799. 인간의 위대한 질문(1)

인간의 위대한 질문(1) (배철현著, 21세기북스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요즈음 프롤로그가 특이한 책 두 권을 동시에 읽고 있다. 눈이 네 개가 아니라 읽다 지루하면 이 책 저 책을 오가며 읽고 있다.

‘질문하는 책들(이동진, 김중혁著, 예담刊)’은 저자가 두 명이어서 그런지 서문도 두 개다. 그리고 에필로그는 없다.

이 책은 프롤로그가 20페이지나 된다. 에필로그는 19페이지나 되니 각각 다른 책의 한 chapter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거의 40페이지에 가까운 글과 본문의 핵심이 표지에 인쇄되어 있다.

저자는 ‘예수의 질문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자비와 연민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고전문헌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성서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예수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유대인들에게 삶에 대한 성찰과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신앙은 분명한 해답이 아니라 스스로 당연하게 여기던 세계관과 신앙관의 끊임없는 파괴이며, 새로운 세계로의 과감한 여행이고 동시에 그 관정에 대한 한없는 의심이다. 사람들은 흔히 종교를 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종교와 경전을 이해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질문들을 통해 삶의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프롤로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인류 최고의 가치인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예수가 가이사랴 마을에 도착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人子(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었다. 人子는 예수의 자기 명칭이며 기원전 2~3세기에는 메시아를 지칭하는 용어로 원뜻은 보통사람이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나 예언자 중 한 분이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는 3년 동안 따라다니며 공부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는다. 예수는 담화의 대상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3년간 동고동락하며 경험한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누구인지 물은 것이다.

지난 2천 년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예수는 과연 어떤 인간인가? 21세기 한국사회에서의 예수는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서양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 놓은 교리와 도그마를 통해 예수를 보고 있지 않은가? 이 책에서는 그 교리와 도그마를 과감히 버리고 21세기 현대인에게 예수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의 현재와 미래

하버드대학 종교학자 하비 콕스는 저서 ‘신앙의 미래’에서 오늘날의 종교인들은 각 종교나 종파의 교리보다는 윤리적인 지침이나 영적인 훈련에 관심이 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추세는 돌이킬 수 없어 현대인들은 종교의 조직이나 교리보다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숨 막히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고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는 세력을 잃고 영성의 시대로 진입했다. 오랜 세월 그리스도교는 생활윤리나 자비보다 교리숭배정책을 강조했고 슬프게도 오늘날까지 만연되어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와 같은 자생적이고 감동적인 모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는 사라질 것이다.


예수가 제자에게 물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은 예수에 관한 역사적이며 과학적인 평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3년 동안 자신을 따라다닌 제자들에게, 스스로에게 맡겨진 미션을 찾도록 촉구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위대한 질문과 삶을 통해 각자의 내면에 감춰진 위대함을 찾아야 한다. 예수가 묻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에필로그: 너의 옆에 동행하는 낯선 자는 누구인가?

엠마오의 저녁식사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3년 전 자신들의 삶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예수라는 청년을 만났다.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며 그가 새로운 유대 왕이 될 것이라는 꿈을 키웠으나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엠마오로 가는 이들은 또 다른 걱정에 매몰된다. 예수를 따라다니느라 실업자 생활을 한 터라 생계가 막막했고 엠마오를 떠나올 때 예수를 도와 로마로부터 유대를 독립시키고 자신들이 엠마오의 고위관리가 되어 돌아올 거라고 장담했는데 자신들을 비웃을 친구들을 생각하니 엠마오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산길을 걷고 있을 때 그들 앞에 ‘제3자’가 나타났다. 누가복음 24장 16절에 부활예수가 나타나 그들과 동행하기 시작했으나 그들이 예수를 알지 못하도록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제자가 3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녔으나 예수를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며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 상을 투영해 그것만을 찾으려 했기에 예수가 옆에서 동행해도 실체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제3자가 말을 건넨다.

‘무슨 토론을 그렇게 열렬히 하십니까?'

두 제자가 침통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추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비웃듯 말한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도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단 말입니까?'

‘무슨 일인데요?’

‘언행이 일치하는 카리스마 있는 예언자, 예수라는 청년이야기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가 카리스마 있는 예언자가 된 것은 언행일치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제자 몇몇이 천사의 환상을 보았는데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있다고 말해주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러자 제3자는 예수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다.

‘당신들은 명색이 제자라 하면서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참 무딥니다. 그 자신이 반드시 이러한 고난을 겪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해 성서 전체의 핵심을 쉽게 설명해 준다. 제3자가 가던 길을 가려했으나 두 제자가 말이 어두웠으니 자신들 집에 묵으라고 간청한다.

고대 유목사회에서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집에 들이는 것은 금기지만 제3자를 초대해 저녁식사를 했다. 실의에 찬 두 제자가 낯선 남자에게 분에 넘치는 호의를 베풀어 식사대접을 했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과 주변, 특히 옆에 있는 나그네의 처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인식하게 된 유일한 통로는 낯선 자에게 호의와 자비를 베푼 행동이다. 이제야 그들은 낯선 자가 예수임을 깨닫는다.


‘누가복음’ 저자는 예수는 바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고 증언한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를 회피하고 차별하고 우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하고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자아’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무위’로 신을 대면하기 위해 ‘다름’을 수용하고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와는 서로 다른 어떤 존재를 신이라 한다. 신의 특징은 ‘낯섦’과 ‘다름’이다. 인간이 태어나 제한된 경험을 통해 형성된 편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존재와 만나는 것이 종교다. 그 낯섦과 다름을 수용하고 소중히 여기며 대접할 때 신은 비로소 우리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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