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著, 21세기북스刊),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제14장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천국이란 무엇인가?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물질적인 공간의 행방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신은 어디에 있는가?’ 혹은 ‘신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라는 탐구와 직결된다. 현대인에게 이 근본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기존 신학계와 종교계를 당황하게 한 사람은 영국 성공회 감독이었던 존 로빈슨이다. 그는 1963년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발간해 ‘채털리 부인의 연인’만큼이나 영국 사회와 그리스도교에 물의를 일으켰다.
존 로빈슨은 그리스도인들이 형상화하는 천국이나 신에 대한 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여기’ 지상에 살고 신은 ‘저기’ 구름 위에서 우리를 지켜본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지구는 천체의 일부로 태양 주위를 존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위아래’가 없음에도 그리스도교에서는 인류를 심판하러 위에서 내려오는 재림예수를 기다린다.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종교에서 말하는 혜택을 ‘싸구려 은총’이라 한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스스로 퇴락과 자멸로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이 ‘싸구려 은총’을 바라는 신자들이 많고 지도자들 또한 이것을 대폭 할인해 마구잡이로 팔고 있기 때문이라 진단한다. 이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 없이 앵무새처럼 죄를 고백하면 용서받는 체계다. 신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 역시 삶을 절대 변화시키지 못한다.
천국이라는 개념의 탄생
아브라함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란 중동의 사막 환경에서 등장한 독특한 개념이다. 이라크 남부지역 인류최초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에게는 에딘(edin)이란 특별한 정원이 있었다. edin은 계곡 사이에 위치한 초록지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척박한 환경에서 지내는 수메르인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이상적인 공간을 구약에서 ‘에덴동산’이라 불렀다면, 신약에서는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라 불렀다. 갈릴리에서 예수가 말씀을 선포한 사건을 두고 성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고 전한다.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공관복음서에서 100번 이상 등장할 만큼 중요한 용어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어디에도 이 왕국이 어떤 왕국인지 확실히 정의하지 않는다. 아마도 예수가 ‘하늘나라’를 선포할 때는 대중들에게 너무나 익숙해 설명할 필요가 없었는지 모른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은, ‘하늘나라’는 미래의 현상 또는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일 수 있다. 주기도문에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마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 것이라 말씀하신다.’라고 되어 있다. 반면 ‘하늘나라’가 이루어진 현실을 지칭하는 구절도 있다. ‘때가 다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예수가 선포한 말의 핵심중 하나는 ‘하늘나라’가 이미 도래했으며 예수의 말과 선교행위를 통해 활동을 개시했다는 사실이다. ‘하늘나라’의 완전한 승리와 완성은 예수의 말을 믿고 행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개개인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행해야 할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가르침이다.
밭에 감춰진 보화를 찾아라
성서에서는 천국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마테복음 13장에 천국에 대한 비유가 등장한다. ‘하늘나라는 마치 밭에 숨겨놓은 보물과 같다.’ 우리는 천국을 특별한 장소, 찬란한 빛이 가득하고 천사들이 노래 부르는 아름다운 장소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는 사후세계가 아닌 밭에서 찾으라 한다. 농부는 밭에서 생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함을 배운다. 예수는 가장 위대한 도시인 예루살렘이나 로마를 천국으로 말하지 않았다. 혹은 훌륭하게 지어진 종교건물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건물에는 신을 공간에 가두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류최고의 가치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람이라고 깨닫고 마지막을 예루살렘에서 보냈다. 그가 예루살렘 입성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러한데 너희는 그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외친다. 인간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욕망이 투사된 신을 만들어 숭배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예배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해못하는 다른 신을 이단이라고 손가락질한다. 자신이 이해하는 신만을 참된 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성서는 ‘사람이 보화를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두고, 기뻐하면서 집에 들어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기록한다. 그 드넓은 밭에서 보화를 발견하는 장소는 한 곳이다. 예수는 이 보화를 다시 ‘극히 값진 진주’ 하나와 비교한다. 천국은 보화 자체라기보다 보화를 찾는 과정이다. 예수는 말한다.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예수는 어떤 것이 우리 각자의 삶에 가장 중요한 진주인지 찾아 나서는 것을 천국이라고 정의한다. 보화를 찾는 것은 끊임없는 탐구과정이며, 이 과정은 바다에 그물을 치고 온갖 물고기 중 좋은 것을 고르는 행위다. 천국은 그러한 삶의 우선순위를 아는 지혜이며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것이 곧 보화라고 말한다.
천국은 겨자씨와 같은 것
예수는 천국을 겨자씨며 누룩이라고 말한다. 겨자는 유대인들이 키우기를 꺼려할 정도로 주위 풀들을 잡초로 만들어 버리는 유해식물이다. 왜 겨자씨에 비유했을까? 실제 1세기 유대인 율법에는 정원에 겨자씨를 파종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겨자가 주위 식물과 야채를 휘감아 초토화시켜 얼마 지나지 않아 겨자나무만 남게 된다.
예수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겨자씨같이 미미한 것에서 시작한다. 정원의 잡초처럼 보잘것없다가 곧 널리 퍼져나가 그것에 닿는 모든 것을 잡초로 만든다. 사람들이 잡초를 뽑으려 하면 할수록 더 빨리 퍼져나간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자기 혁명은 겨자씨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삶을 통해 상대방이 천국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천국을 경험한 자가 아니다. 예수는 말한다.
겨자씨는 어느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느 풀보다 더 커져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 또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과 섞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는 유대인 가정에서 매일 먹는 밀가루 빵을 들어 하늘나라를 설명하고자 한다. 누룩은 겨자씨와 마찬가지로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다. 하지만 밀가루반죽에 더해져 시간이 흐르면 전체가 부풀어 오른다. ‘하늘나라’를 갈망하는 마음도 인간의 삶에 더해진다면 누룩이 변화하듯 삶 전체가 변화할 것이다.
이것은 곧 삶 속에서 자기 혁명이라 할 수 있다. 혁명은 일상을 비범하게 보고 듣는 연습에서 시작된다. 남다르게 보고 듣는 지혜로 숨겨진 보물들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은 그물과 같아 삶의 소중한 것을 찾아 건져내는 행위이며 진주를 찾아 나서는 것과 같다. 예수는 천국을 찾는 모험을 강행하라고 촉구한다.
1세기 바리새인들은 천국이 어디며 언제 오는지 반복적으로 예수에게 질문한다. 그러자 예수는 천국은 인간이 볼 수 있는 장소도 아니고 존재하는 시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말한다. 천국은 죽은 뒤에 가는 곳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이곳이다.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며 이웃과 가족과 심지어 원수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