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모셨던 사장님께서 곧 퇴임하시니 사장님 뒷 담화를 해볼까 한다. 어차피 사장님께서도 읽으시는 글이니 뒷 담화보다는 앞 담화가 맞을듯한데 ‘뒷 담화’라는 제목에서 호기심이 유발된다.
본사에서 제일 커다란 조직이었던 기술개발처가 쪼그라들어 기술개발실로 되었고 급기야 기술연구원의 기술기획팀으로 전락했다. 쪼그라들기 전인 2009년부터 기술개발업무를 맡아보려는 생각이 있었기에 망한 조직을 담당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사전에 보고 드렸다.
‘우리 회사 기술기획분야 최고 고참으로 쓰러져가는 기술기획팀을 살려보고자 1년을 준비하고 공부했습니다. 2년 동안 치열하게 일하다가 능력이 부치면 미련 없이 떠나겠습니다. 인력이 부족한 것은 알고 있지만 기술기획팀 업무성과가 부진하여 증원시켜 달라할 만한 명분이 없으니 그냥 가겠습니다. 일하는 모습이 치열하다면 주위에서 증원을 시켜 주리라 생각합니다.’
‘사장님 생각은 어떠신지 몰라도 우리 회사 연구개발은 中間進入戰略(Mid-Entry Strategy, 중간진입전략)을 택해야 합니다. 기초부터 연구하는 국책연구소의 R&D가 아니라, 개발된 요소기술들을 조합하여 신제품을 만드는 우리 회사 실정에 맞는 R&D전략으로 중장기 기술개발계획을 수립하겠습니다.’
‘지난 세월, 기술개발의 틀이 무너졌으므로 제가 사장님께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후배들에게 기술개발의 틀을 다시 잡아주신 사장님으로 기억되게 하는 것이지만, 저에게 성과를 내놓으라 재촉하시면 부담이 되어 일할 수 없으니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기술개발의 틀이 무너진 원인 중에는 재임기간 중 성과를 내놓으라 하는 CEO들의 성화도 있었으니까요.’
처음 보는 친구가 찾아와 아래 직급인 팀장자리를 달라하니 당황하셨을 텐데도 사장님께서는 빙긋 웃으시면서 ‘그래도 내가 있을 동안 작은 성과는 있어야지. 하지만 재촉은 하지 않겠네.’ 사장님께서는 2년이 아닌 3년을 기다려 주셨고, 나는 기술개발 프레임을 다시 짰다. 아직 커다란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사 창립 최초로 라이선스 허여 및 판매, 逆기술협력계약 체결, 기술지원계약체결, 무형기술판매 등 몇 건의 기술을 판매하고 사업화했다. 모든 성과는 3년간 참아주시고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회사는 ‘기술과 인력’이 중요하다고 힘을 실어 주신 덕분이다.
2012년 9월 逆기술협력계약을 체결하는 날 만찬이 있었다.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우리 회사가 사 창립 최초로 땀 흘리지 않고 Royalty를 받는 계약이라 가슴이 벅찼다. 사장님과 전무님, 상대회사 사장, 부사장님을 모시고 행한 만찬자리, 상대회사 사장님 주량이 보통이 아니었다. 기분이 좋아 그랬는지, 주량이 세지 않은 사장님을 위해 흑기사를 자청한 탓인지 술이 과했다. 사장님께서도 기분 좋으셔서 2차 노래방을 갔으나 술을 깨기 위해 시원한 바람을 쐬러 나간 내가 행방불명되었다. 사장님과 전무님 모두 나를 찾느라고 난리 났으니 사장님을 모시러 갔다가 사장님이 나를 모신 셈이 되었다. 다음날 죄송한 마음에 차가운 수박 한 덩이 들고 갔다.
‘사장님 어제는 제가 술이 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내 것 받아 마시느라 그랬지, 고생했다.’
그날 동석하셨던 전무님은 요즘도 술자리에서 어느 정도 드시면 저에게 이러신다. ‘임처장, 집에 갈 수 있을 정도만 마셔!’ 다른 분들은 전무님이 하시는 이야기의 진의를 잘 모른다. 속으로는 ‘저 양반이 술만 마시면 집에 들어가지 않고 세컨드한테 가나?’라고 할지 모른다.
2012.11월 일본 출장을 수행했다. 쓰나미로 인해 후쿠시마 원전에 사고가 발생했고 폐로 결정이 되었지만 상황이 궁금했다. 평소 폐로에 관심을 갖고 있어 사장님께 폐로사업에 대해 몇 번 보고를 드린 터라 사장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가시기로 결정하셨다. 하지만 승격인사를 1주일 앞둔 시기라 많은 눈이 제게 쏠렸다.
‘썬 파워네, 승격 인사위원회가 다음 주인데 사장님 모시고 해외출장을 가고...’ 친한 분들은 ‘이번에 사장님께 잘 보여 승격을 하세요.’ 했지만 일본 출장 중에 승격과 관련된 이야기는 단연코 없었다. 내가 말씀드린 내용이 승격의 당락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공정한 게임이 아니기에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세 사람에 대한 말씀은 드렸다. ‘A실장이 인품은 일등인데 소요년수가 차지 않아 아깝게 되었습니다. B소장 휘하의 팀장문제로 인해 국정감사를 받게 되었는데, 팀장에 대해서는 동기들까지 등을 돌린 상태이며, B소장이 마음고생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C실장은 마찰이 있었지만 기획능력으로 볼 때는 으뜸입니다.’
내가 승격후보자 중 서열이 가장 낮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승격을 하겠다고 조르면 사장님과의 출장길이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2박 3일 동안 사장님과 호텔에 있는 온천에서 목욕 두 번하고, 같이 누워 마사지를 받고 포장마차에서 사케를 마신 것 말고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나도 의아하게 승격했고 많은 분들이 의아해했다. 승격 발표 후 사장님 말씀은 ‘자네는 내가 승격시키자고 했는데 주위 반대가 없더라, 평판을 들어 보니 보기보다는 인기가 많던데.’
사장님은 항상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강조하셨다. 소통의 정도와 주위의 평판을 듣고 인사검증을 하시는 것 같았다. 사내 모든 정보가 사장님께로 쏠리게 되어 있어 내가 고집이 세다는 이야기 하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승격했다.
보임받자마자 사장님께 ‘많은 성과는 내지 못할 테니 조르지 마세요. 기술개발을 망친 이유 중의 하나는 CEO들의 조급한 마음도 있습니다.’ 라며 뼈 있는 말씀드렸고, 사장님을 모셔야 하는 만찬장에서 사장님이 나를 모시게 만들었고, 승격시켜 달라 한 번도 말씀을 드리지 않았는데 승격시켜주셨다. 또한 쫄딱 망한 기술기획팀을 6개월 만에 기술개발실로 독립을 시켜주셨고, 또다시 1년 반이 지나 처로 격상되는 어메이징 한 일이 생겼다. 11월 7일 퇴임하여 야인으로 돌아가시는 사장님께 한번 여쭤보려 한다.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