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철학, 역사를 만나다(1)

(안광복著, 웅진 지식하우스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철학도 어렵고 역사도 어렵습니다. 어린 시절 곰팡내 날 것 같아 멀리했던 철학과 역사책을 이제야 꺼내 들고 오늘을 공부하고 있는 내 모습이 후회되기는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수천 년 전 이야기에서 미래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읽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오늘은 골치 아픈 철학과 역사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愚(우)를 범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대 그리스 최고 문명국가인 아테네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여 다수결에 따라 정책과 죄의 유무를 가렸다. 법률에 대한 지식이 없던 노인들은 수당을 타려 재판에 참여했고, 성인 남자들이 참여하는 민회에서는 고통과 인내가 필요한 정책에는 반대했으며 화려한 말솜씨로 대중을 속이는 사람들이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賤民的(천민적) 민주주의가 발호했다. 반면 스파르타는 어릴 때부터 집단생활을 하며 군사훈련을 하였고 쾌락은 배재되었다. 겸손과 예절이 강조되고 말을 아끼는 것이 미덕이었다. 공동식사를 하니 부자도 좋은 음식을 먹지 못했고 화려한 식기의 사용도 억제되어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졌고 스파르타인 들은 “영예로운 인생”즉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을 가장 아름답고, 중요하게 여겼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스파르타를 동경했으며 플라톤이 꿈꾸는 참된 지혜를 갖춘 철학자가 양성되고 그에 의해 통치되는 유토피아도 스파르타였다.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고 20년간의 전쟁 끝에 아테네는 무너졌다.


역사적으로 강대했던 제국들은 대개 뚜렷한 도덕적 기준과 목표를 갖고 있었다. 중국 한나라는 유교라는 국가 철학이, 500년의 세월을 버틴 조선 왕조에는 성리학이라는 윤리질서가 있었다. 로마제국은 1500년간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을 통치했던 강국이었으나 초기에는 나라가 허술했다. 지성에서는 그리스보다, 체력에서는 게르만보다,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 보다, 경제력은 카르타고인 에게 뒤떨어지는 이탈리아의 조그만 도시국가인 로마는 스토아철학을 국가철학으로 삼아 강대국이 되었다. 청교도정신은 영국의 아웃사이더 철학으로 미국에 건너가 꽃을 피웠듯, 스토아철학은 그리스에서 발생된 소외받은 철학이었다. 스토아철학은 세상일은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우주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 헛된 감정에 휩싸이지 말고 너의 앞에 놓인 임무만 충실히 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군인정신에 맞는 것이고 개인의 용맹함보다 군진의 규율로 승부를 내는 로마군단에게 맞는 철학이었다.


유교의 본질은 仁과 禮이다. 윗사람이 솔선수범하여 인을 쌓고 예를 세워 아랫사람이 따르게 해야 한다. 사회지도층부터 정의롭게 살며 덕으로 다스리고 사랑으로 감싼다면 세상의 갈등과 다툼이 사라진다 했다. 공자의 주장이 권력자들에게 먹혀들어간 이유는 ‘권력자들의 장식품’으로 훌륭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강한 군사력으로 생존했지만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 모든 사상 관련 서적을 불태우고 학자를 산채로 파묻는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른 진나라는 20년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 이후 한나라의 유방이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겼지만 유방은 국가를 이끌 철학이나 카리스마가 없었다. 이때 유행한 것이 억지로 하려 하지 말고 가는 대로 내버려 두라는 황로사상인데 몇 가구가 사는 산골마을에서는 좋은 사상인지 몰라도 나라의 통치철학으로는 부족했다. 이후 4대가 흘러 한무제 때의 걸출한 학자 동중서가 공자를 통일제국을 이끌 ‘문치 프로그램’ 창시자로 끌어올리면서 유교를 통치철학으로 확립하였다.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고도 조화를 이루며 강제하지 않아도 우러나오는 존경심으로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든다는 ‘통치의 황금률’을 세웠다.


朱子學(주자학)은 조선 500년의 통치철학이었다. 족벌세습경영의 폐해로 고려가 망했는데 고려 말의 신진 사대부들은 논어, 대학, 중용, 맹자등 유교의 경전을 시험과목으로 한 과거시험을 보고 당당하게 관직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국가경영에 대한 지식과 국가를 개혁할 비전을 갖고 있었지만 부패한 족벌귀족들이 이들의 앞날을 가로막고 있었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신진사대부들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을 세우게 되었다.

주자학은 주자(1130~1200)가 새롭게 해석한 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신진 사대부들이 주자학에 관심을 둔 이유는 첫 번째가 爲己之學(위기지학)의 이념이다. 공부의 목적이 성인이 되는 데에 있지 출세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두 번째가 格物致知(격물치지) 정신으로 인격수양을 위해서는 먼저 사물을 연구하고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 무엇이 진정으로 옳고 그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자, 맹자 등의 옛 성현들이 이미 작업을 완벽하게 해 놓았으므로 후대는 그들이 남긴 글을 깊이 되새기기만 하면 된다. 爲己之學과 格物致知의 정신은 음서로 관직에 오른 귀족의 자제와는 달리 치열하게 유학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한 자신들에게 적합한 정신이었다. 주자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자 공부를 통해 마음을 수양하지 못한 왕들은 왕으로 대접받지 못해서 왕도 학자와 같이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독서를 해야 했다.

하지만 주자학의 치명적인 결함은 학문과 인격수양을 지나치게 증시 하여 소모적인 당파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유학의 수많은 명분들은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고 조선 후기로 들어가며 소수가문이 권력을 틀어쥐는 고려 말의 상황을 닮아가면서 조선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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