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著, 웅진 지식하우스刊)
20세기는 카를 마르크스(1818~1883)의 시대였다. 전 세계는 마르크스를 영웅으로 받드는 국가들과 ‘악의 화신’으로 여기는 나라들로 대립되었다. 불과 10여 년까지 세계인구의 3분의 1은 마르크스를 신봉하였고 그의 가르침대로 세상을 바꾸려 노력했는데 역사상 어떤 종교나 사상도 못했던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1990년 구소련의 몰락을 시작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앞에서 꼬리를 내렸다.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칠수록 자본의 문제점이 드러나는데 일부 사람들은 마르크스에 기대어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찾는다. 흔히 ‘좌파’로 불리는 사회비판세력의 대부분은 마르크스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르크스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은 이유는 그의 사상이 ‘공산 사회’라는 인류의 오랜 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스크루지는 자본가의 모습이었고 성냥팔이 소녀는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이었다. 산업이 발달할수록 빈부의 격차는 늘어갔고 노동자의 삶은 비참해졌다. 삶이 고단할수록 사람들은 평등하고 억압 없는 세상을 꿈꾸기 마련이고 이런 문제점을 해소해 줄 사상을 갈망할 때 등장한 것이 마르크시즘이다. 하지만 공산주의혁명에 성공한 국가들은 더 심한 빈부격차가 생겼고 자유를 억압했기에 몰락하였다. 자본주의를 죽이려 했던 공산주의는 약자에 대한 배려, 사회안전망 개선 등으로 무장한 따뜻한 자본주의에 의해 거꾸로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에 살고 있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왕의 식탁에나 오를법한 농수산물들을 일상의 음식으로 먹고 있지만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앞으로 문명이 더 발전하게 되면 사람들이 더욱 행복해 질까? 선진 문명의 혜택을 받을수록 꿈은 작아진다. 우리나라도 6~70년대 대학생들은 ‘정의 사회 건설’이라는 커다란 포부와 이상이 있었지만 풍요로운 지금의 대학생들 책상 위에는 영어책만 있을 뿐이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람은 작아지고 말초적 쾌락만을 추구하며 삶은 권태로워진다.
나아질수록 더 불행해진다는 이 괴상한 문명의 역설을 니체는 명확하게 진단하고 처방했다.
자유주의는 개개인의 욕망을 존중한 나머지 우월과 열등의 구분을 앗아갔으며 사회주의는 평등을 강조하여 새롭고 뛰어난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도 다수와 같은 대접을 받게 만들었다.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한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사소한 다툼만이 남았고 그런 인류 앞에 놓인 것은 허무뿐이었다.
니체는 겸손, 순종, 친절, 동정 등 우리가 품고 있는 ‘선함’의 기준은 ‘노예의 도덕’이며 밝고 당당하며 때로는 냉혹한 것을 ‘주인의 도덕’으로 생각했는데 주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도 겸손하지 않으면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으로 평가받기에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졌다. 이의 주범은 기독교이며 불구자, 약자, 범죄자를 사랑하라는 교리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신은 죽었다.’ 기독교가 인류를 저열한 자들의 기준에 맞추어 타락시키고 있다면 이제 그러한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인류에게 중요한 과제는 모든 사람들을 배려하고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뛰어나고 강한 사람을 길러 내는 데 있다. ‘인류의 도덕은 가장 뛰어난 자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 즉 ‘초인’이 출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니체의 이러한 생각을 교묘히 왜곡한 사람은 히틀러이다. 니체가 정신병으로 죽자 유대인 혐오자였던 동생 엘리자베스는 니체의 저술을 마음대로 편집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히틀러, 당신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나치는 유대인과 슬라브인을 하위인간으로 분류했고 독일 민족을 지배민족으로 그들을 지배하고 문명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니체가 말한 ‘초인’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논리였다.
이렇게 왜곡되어 ‘나치 철학자’라는 오명을 쓰게 된 니체는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해 오명을 벗게 되었는데 니체가 말한 초인은 결코 인종적이거나 태생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었다.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만을 강조하여 하향평준화가 되고 있는 세상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라는 외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