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영著, 진경문고刊)
많은 가르침을 주신 연암선생님은 성격이 괄괄했다. 내가 박제가를 처음 소개해 드리러 연암선생댁을 방문했다.
‘이덕무입니다. 박제가와 함께 왔습니다.’
‘알았네, 잠깐 기다리게.’
한참이 지난 후 방문이 열려 들어가 보니 선생은 갓과 도포를 갖추어 입고 우리를 정중히 맞이하였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연암선생이 정갈한 다기에 밥을 지으셨다. 흰 주발에 밥을 담아 옥쟁반에 받쳐 내오며 술도 한잔 권하며 덕담을 하셨다.
‘슬기로운 젊은이여 오래 사시게.’
열한 살이나 어린 박제가의 재능과 인품을 알아보신 것이다.
코끼리를 처음 본 사람들마다 말하는 것이 달랐다. 코로 먹이를 먹는 것을 본 사람들은 입이 유난스레 긴 동물로 착각해서 아니 코끼리의 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코를 다리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코끼리는 다리가 다섯이다.
‘자네들의 눈과 귀를 그대로 믿지 말게 눈에 얼핏 보이고 귀에 언 듯 들린다고 해서 모두 사물의 본모습은 아니라네.’ 선생이 탓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과 귀가 아니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1778 박제가와 나는 중국사신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중국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정리하여 박제가는 북학의를 발간하였다. 박제가는 ‘현재의 백성들 생활은 날로 어려워지고 국가의 재정은 바닥이다. 사대부는 그저 팔짱만 끼고 있고 백성들을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른 채만하고 있을 것인가?’ 라며 끝을 맺었다.
1779년 박제가, 유득공, 서리수와 나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었다. 이렇게 벗과 나의 시대가 새롭게 열리고 있었다. 전하는 규장각의 위치를 궐 안에서 제일 풍광이 좋은 곳으로 정하고 건설을 친히 챙기셨다. 누각의 이름을 宙合樓(주합루: 우주와 하나 된다는 커다란 뜻)라 정하고 현판의 글씨도 직접 쓰셨다. 당직을 설 때 글을 읽고 있는데 인기척이 있어 고개를 드니 전하가 환히 웃고 계셨다. ‘네 글 읽는 소리가 듣기 좋구나. 계속 읽으라.’ 어쩔 줄 몰라하는 하는 나에게 ‘목소리를 좀 더 높여 읽으라.’ 하시며 몸을 돌리셨다. 전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 글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다.
정조대왕은 문과 무는 수레의 두 바퀴처럼, 새의 두 날개처럼 보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셨다. 규장각을 설립하여 학문의 토대를 단단히 닦아놓은 전하는 1788년 조선의 중앙군대인 壯勇營(장용영)을 만드셨다. 한편, 백동수에게 武藝圖譜通志(무예도보통지)를 만들라고 하셨다. 무예를 그림으로 자세하게 설명하여 모든 것을 아우른 책이란 뜻이다. 백동수와 장병들, 화공들이 힘써 만든 책에 박제가가 글을 썼다. 전하는 ‘최근에 펴낸 책은 많으나, 일러두기나 체제부터 인쇄 판각의 글씨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훌륭한 책은 없었다. 판본에 기름을 먹여 영원히 보존하라.’며 만족해하셨다. 무예도보통지의 발간으로 ‘문’의 그늘 아래 움츠려 있던 ‘무’가 비로소 날개를 펴게 되었다.
#정조(1752~1800) 사도세자의 아들로 즉위기간은 1777~1800로 개혁군주로 불린다.
추후 이덕무는 적성현감, 유득공은 양평현감, 박제가는 부여현감, 백동수는 비인현감을 하였다. 이덕무는 1793년 1월 25일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795년 4월 정조는 이런 명을 내렸다. 검서관 고 이덕무의 학식과 능력을 잊을 수 없다. 500냥을 내릴 테니 유고문집을 만들고 신료들이 도와 속히 인쇄에 부치도록 하라. 雅亭遺稿(아정유고) 아정은 이덕무가 말년에 쓰던 호이다.
하지만, 1800년 정조가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자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세도정치가 득세하고 정조의 개혁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老論(노론)의 득세로 반대파이자 개혁세력인 南人에 대한 모진 박해가 시작되었다. 辛酉迫害(신유박해)는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으로 보이지만 반대세력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었다.
개혁군주의 죽음은 젊고 유능한 개혁가, 실학자들의 몰락을 몰고 왔으며 더불어 조선의 낙후와 쇄국을 수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