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네 사람의 아내를 가졌습니다.
한수원의 연이은 비리로 인해 팀장급 이상 간부들에 대해 재산등록을 하겠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국민에게 봉사하는 기업이니만큼 수정처럼 맑아야 할 전력산업계가 흙탕물이 된 후 제시된 自發的 自淨對策(자발적 자정대책)중 하나가 재산등록입니다. 비리 예방을 위해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만 재산등록을 하는 줄 알았는데 1000여 명 팀장 이상 직원에 대해서도 재산변동을 감시한다는 이야기이니 신뢰관계가 깨져도 단단히 깨진 것이지요.
전력산업계 직원들 太半(태반)이 奧地(오지)에 근무하고(이로 인해 종사자 대부분이 가족과 따로 생활해야 하는 토종 기러기족입니다.) 세상물정도 모르는데(가족관계등록부도 모르는 직원들이 많아 퇴직 후에는 사기꾼들의 주요 표적이 됩니다.) 몇몇 사람들로 인해 재산등록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겼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집사람 명의인 차량을 제 앞으로 등록할 일이 있어 집사람이 명의이전 등록을 해줬는데 평생 발전소만 바라보고 살아온 한수원 식구들이 재산등록 하는 방법이나 제대로 알려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금전의 유혹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오늘은 ‘돈’과 ‘업’에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를 드릴까 합니다.
길상사는 대원각이라는 요정이었습니다. 대원각은 삼청각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컸던 요정입니다. 저는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한 도량입니다. 어떤 종교단체를 막론하고 시대와 후세의 모범이 된 신앙인들은 하나같이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신앙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이겨 나가야 할 과제지만 선택된 맑은 가난, 곧, 淸貧(청빈)은 아름다움입니다.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은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와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오늘 같은 경제난국은 물질 풍요에만 눈멀었던 우리에게 우리 분수를 헤아리게 하는 맑은 가난이 지닌 뜻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 97.12.14 길상사 창건 법회, 법정스님 -
법정스님의 불교계에 대한 우려만큼 요즈음 개신교의 고민과 지탄대상은 교회 대형화와 풍요로움 입니다. 믿는 자를 적대시할 것까지는 없지만 성령이 넘치는 성전을 만들기보다 외형으로만 커져가는 대형화와 사치화는 교단뿐 아니라 교인들 고민거리이기도 합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는 목사님을 포함해서 신도가 여덟입니다. 목사님 가족을 포함해서 여덟이니 여느 교회 구역예배 식구들보다 적습니다. 기도할 때야 답답한 마음에서 외형적으로 커지고 성령도 넘치도록 기도하지만 규모가 작으니 다른 사람들은 대형화가 고민인데 저는 교회 갈 때마다 소형화가 걱정입니다. 신도이기 전 사람이니 물질의 빈곤함이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 청빈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덜 쓰고, 조금 덜 먹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마음이 넘쳐흘렀으면 합니다. 아랫글은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인데 原典(원전)이 불분명하나 불교 쪽인 듯합니다.
네 사람의 아내를 둔 돈 많은 상인이 있었습니다. 상인은 네 번째 아내를 가장 사랑했고 가장 좋은 음식만 사주었습니다. 세 번째 아내도 사랑해서 늘 친구에게 뽐내고 다녔으나 다른 남자와 도망갈까 불안해했지요. 두 번째 아내도 극진히 아꼈고 그 아내는 사려가 깊어 비밀까지 털어놓았습니다. 첫 번째 아내는 동반자였으며 가사를 돌봤고 부와 사업을 유지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첫 번째 아내는 남편을 사랑했으나 상인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병이 들어 죽을 때가 가까워 오자 네 번째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난 당신을 사랑했소, 당신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당신을 끔찍이 아꼈소, 난 이제 죽을 텐데 날 따라오지 않겠소?’
‘절대 안 돼요,’ 아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고 아내의 말은 비수가 되어 상인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세 번째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내 평생 당신을 아주 사랑했소. 내가 죽을 텐데 나와 함께 가지 않겠소?’
‘절대 안 돼요,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요. 나는 당신이 죽으면 재혼 할 거예요.’
두 번째 아내에게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도울 수가 없네요. 기껏해야 당신을 묻어줄 수 있습니다.’
상인은 기가 막혔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첫 번째 아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따라가지요, 당신이 어딜 가든 난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첫 번째 아내는 너무 말라 거의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 같았습니다. 상인은 비탄에 잠겨 혼잣말을 했습니다. ‘내가 진작 당신을 좀 더 보살폈어야 하는데’
바람피우는 친구를 동경하셨다면 희소식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읽는 모든 분들은 누구나 네 사람의 아내를 가졌습니다.
네 번째 아내는 ‘몸’이며 그것이 멋지게 보이도록 돈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도 내가 죽으면 내 곁을 떠납니다.
세 번째 부인은 ‘지위와 부’입니다. 죽으면 다른 사람에게 가지요.
두 번째 아내는 ‘가족과 친구들’이며 살아 있는 동안 가까웠어도 그들이 내 곁에 가장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곳은 무덤가입니다.
첫 번째 아내는 내가 지은 ‘업’입니다. 물질, 쾌락, 재산을 추구하느라 종종 업을 잊지만 업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무덤까지도 따라옵니다.
業(업)은 나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업은 前生(전생)에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결과가 現生(현생)에서 받는 應報(응보)로, 선행을 베풀고 공적을 세우면 죽은 다음 공과 덕을 기리는 頌德碑(송덕비), 功德碑 (공덕비)가 세워지는데 이것도 업입니다.
월급쟁이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는데 ‘돈’으로 승부하지 말고 ‘공과 덕’으로 승부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