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만이 가질 수 있는 희망입니다.
기술개발실 부임 후, 경영평가 5년 치 성적을 뽑아보라 했습니다. 성적표는 참담하게 2010년까지 5년 연속 꼴등이었습니다. 부임 전 몇 년 동안 꼴등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5년 전 성적표는 꼴등이 아니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제 예상이 빗나갔습니다. 6, 7년 전 것을 알아보면 직원들이 더욱 비참하고 당혹스러워질까 봐 호기심을 억눌렀습니다. 성적을 알아본 것은 성과급을 받지 못해 항의한다거나 일등을 해보겠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부서 위치가 어디인지 궁금했고 좌표설정을 해야 하니 알아보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부서에 생기가 없어 혹시 경영평가 연속꼴등 때문에 직원들 사기가 떨어진 것은 아닌가? 연관관계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예상했지만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 올해도 꼴등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뭔가 평가받을 때 꼴등 한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고 더군다나 5년 연속해서 꼴등 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어느 부서보다 인센티브를 적게 받아서 주머니가 얇아졌다는 것은 참을 수 있는 일입니다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했는데도 연속 꼴등이라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사업소도 밤새워 일하지만 본사도 만만치 않습니다. 저희 실은 본사의 아침을 엽니다. 저는 집이 가깝고 아침 잠이 없어 일찍 출근하지만 멀리 사는 직원이 많은데도 출근시간이 유난히 빠릅니다. 양평에서 출근하는 직원도 있고 일산에서 오는 직원도 있지만 일찍 출근합니다. 아침 일곱 시 전부터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해 여덟 시 이전이면 모두 출근하고 사업소와 본사 타 부서가 출근하기도 전에 아침미팅이 끝납니다. 물론 빨리 출근한다고 실적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예전 같은 분위기로는 당연히 꼴등 할 테니 출근이라도 1등을 해보자는 조치입니다.
기획처 주관으로 평가기준설정을 하는 회의에 가면 불이 튀길 정도로 격한 토론이 벌어집니다. 평소에는 퇴근길에 막걸리를 나누는 사이지만 회의에 들어가면 전쟁을 합니다.
왜 같은 평가군 에 있는 부서가 타 부서를 평가하냐?
작년도에 배정되었던 점수가 왜 줄어들었냐? 왜 늘어났냐?
부서 특성이 다른데 왜 평가군을 이렇게 편성했냐?
이런 식이라면 평가를 받지 못하겠다...
평가방식과 방법에 대한 이견이 첨예하여 몸이 말라 땀도 안 날 것 같은 기획처장이 사회 보느라 진땀을 흘립니다.
평가방법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습니다만 토론에 참여하시는 분들도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번 회의 때는 제 목소리가 제일 컸지만 저도 평가 목적을 생각해 보고 목소리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기술개발실은 기술개발을 잘하라고 생긴 조직이니 기술개발을 잘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이것이 주된 평가요소가 되어야 하고, 사업부서는 돈 벌어오라고 만든 부서이니 돈 버는 것으로, 관리처, 재무처는 지원부서이니 지원을 잘하느냐 여부로 평가를 받아야겠지요. 물론 회사전체에서 추구하는 방향이 있고 공통지표도 있을 것이니 그런 것은 같이 노력해야 하고 노력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면 불만이 적어질 수도 있습니다.
2011년 본사 내부 경영실적평가 결과 기술개발실은 6개 부서중 4위를 했습니다. 초라한 성적표 같지만 기술개발실 식구들 가슴은 벅찹니다. 어느 부서는 연속 1등을 했다지만 만년꼴찌에서 탈출한 기분도 1등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이거든요. 5년 꼴등을 하다가 4등을 했으니 내년에는 3등만 해도 성공이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습니다. 꼴찌만이 가질 수 있는 희망입니다.
물론 부서원들에게 말로는 1등을 지향한다 해도 현실의 벽도 있는 반면 장점도 있습니다. 우리 실은 10여 명으로 본사에서 가장 작은 조직이라 평가를 잘 받기 위해 또는 지표관리를 위해 본연의 업무인 기술개발업무를 등한시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조직이 작고 단순하니 일사불란함은 1등입니다. 내일까지 전원 제안제출, 오늘까지 PC보안점검... 특히 막걸리 먹는다고 하면 더욱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기술개발실이 탈꼴찌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기술개발실이 잘해서 탈꼴찌를 했겠습니까? 성공하는 연구를 하고 연구결과물 판매, 기술을 판매하는 등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게 여러분들께서 성과를 내주셨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더욱 잘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신나게 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꼴찌탈출을 자축하면서 기술실 직원들이 막걸리 잔을 세게 부딪치는 날입니다. 탈꼴찌 희망을 불어넣어주신 여러분들께 거듭 감사인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