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막걸리 번개팅

기울 기울 기울어져가는 막걸리잔

by 물가에 앉는 마음

서구적 합리성의 근거는 ‘나’라는 주체의 성립이다. ‘나’가 있어야 그에 상응하는 ‘너’라는 존재가 가능해진다. 서양인들은 ‘나’와 ‘너’의 동등한 관계로 만날 때 ‘우리’가 가능해진다. 서양인에게 타인의 존재는 항상 ‘나’의 상대방으로서 ‘너’다. 그래서 생판 모르는 사람과도 곧바로 날씨 이야기도 할 수 있고 같이 웃으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사뭇 달라 ‘나’와 ‘너’라는 상호주체의 만남은 ‘우리’와 ‘남’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야 한다. ‘남’은 상대방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무서운 것이다. 타인이 ‘우리’라는 경계를 넘어올 경우 타인은 더 이상 남이 아니다. 이때부터 ‘너’라는 가치를 갖는다. 서구인들은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고 한국인들은 우리가 먼저 만들어지고 난 후 나와 너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김정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반대한다. 中에서)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만드는지 모릅니다. 해병전우회, 고대동문회, 호남향우회는 베트남에도 미국에도 있고 이곳 분당에도 있습니다. ‘지구가 멸망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을 인터넷 검색하면 고부갈등, 바퀴벌레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세 단체가 나옵니다. 하지만 호남사람도 아니고, 민족 고대를 졸업하지도 않았으며, 귀신 잡는 해병대에 복무해보지 않아 끈끈한 정도를 알 수 없습니다.


끈질기고 독해 어릴 적 별명이 일본순사였지만 한국 토종이라 그런지 2007년 경영자과정 교육을 받으면서 많은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호남도 아니고 고대도, 해병대도 아니지만 ‘우리’를 만드는 행위지요. 전력그룹사 직원들 95명이 함께 교육받지만 워낙 조직이 방대하다 보니 서로를 모르는 서먹서먹한 관계였고 회사에서 받은 미션이 인적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라 꼬투리만 잡히면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o 2호선은 달린다.

o 3호선도 달린다.

o 정문 빌리아드 클럽

o 후문 빌리아드 클럽

o 정, 후문 빌리아드 통합클럽

o 매주 산악회

o 영어반 모임

o 유럽여행 모임

o 일원동파: 모임 명칭이 조폭 같지만 일원동 먹자골목 가서 새벽 2시까지 술 먹는 모임입니다.

많은 모임을 주관했고 학생회비를 관리하는 총무다 보니 타 회사 학우들이 모임을 하려면 일정을 조율하고 승인받는 상황도 연출되곤 했습니다.


본사에 복귀해서는

o 잘생긴 사람들 모임

o 멋있는 사람들 모임

o 좋은 사람들 모임 등

모일 때마다 이름을 달리 했는데 작명하기 귀찮아 본사는 ‘막걸리 번개팅’으로 통일했습니다. 매분기 4~50명 정도에게 사발통문을 돌리면 20명 정도가 모입니다. 한동안 회사 내 사적모임을 해체하라 한 적도 있지만 매번 참석자들도 다르고 감사실 식구도 오니 사적모임으로 오해받을 일은 없습니다. 모이는 날 비가 오려고 찌뿌드드하거나 상사에게 마음을 다친 사람이 많으면 참석인원이 늘어납니다. 번개팅은 모든 것이 자유로우나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직급, 나이를 불문하고 오는 순서대로 좌석에 앉고 4명이 되어야 음식을 시킵니다. 본사는 퇴근시간이 불규칙하니 일찍 오신 분과 늦게 오신 분 모두를 배려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만 있습니다.

직장인들이야 모이면 처음 5분간은 상호 간 안부를 묻지만 막걸리 한 두어 순배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만나서 막걸리 한잔하고 헤어지면 아무 의미도 없기에 가끔은 토의주제를 선정해 드리기도 합니다. ‘왜 사무직과 기술직 간에는 벽이 있다고 할까?’ ‘회사가 나아갈 방향’등을 토론하고 공유하지만 통제하지는 않습니다. 본사 전부서가 골고루 참석하는 저녁모임이 없으니 본사에 처음 근무하는 사람들은 안면을 넓히기 위해 자주 참석하시는 분도 계시고 누구는 미워도 누구와는 친하니까 오시는 분도 계시고, 잔무가 남아 막걸리 한 사발로 저녁을 해결하고 가시는 분도 계십니다.


가끔 비용조달을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참석자 파악 시 스폰서 신청을 함께 받습니다. 찬조금액은 1인 10만 원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만 스폰서가 넘쳐서 아직 제 주머니를 털은 적이 없습니다. 이번 번개팅에도 6분이 스폰싱을 신청하셨지만 아쉽게도 늦게 신청하신 분에게는 차례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지난 월요일

금년도 번개팅을 마무리했습니다.

기울 기울 기울어져가는 달과 함께

기울 기울 기울어져가는 막걸리잔

가로수 푸른 잎이 紅葉으로 바뀌는 만큼

얼굴도 한껏 붉어지고

이렇게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함께

晩秋의 밤은 맛있게 취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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