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아著, 선우미디어刊
미국 사는 누이와 부모님은 같지만 성이 다릅니다. 저는 林이고 미국식으로 매형의 성을 갖게 된 누이는 李입니다. 성이 다른 누이의 3번째 수필집이 나왔는데 전 직원들께 나눠 드리기에는 지갑이 얇아 한 꼭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누이는 시인이자 언론인이셨던 아버님께 글쓰기를 배웠고 저는 누이의 글을 보고 글쓰기 연습을 합니다. 제가 글쓰기 연습을 끝내고 책을 묶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회사 식구들께 나눠 드리겠습니다, 누이의 책소개, 書評은 인터넷 ‘자카란다’를 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詩詩한 나의 글쓰기
초등학교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은 늘 내게 시를 지어오라고 하셨다. 시에 맞는 그림을 그려 학급 게시판에 붙였는데 아마도 내 실력을 과대평가하셨지 싶다. 시인의 딸이니 시를 잘 짓겠지 하였겠지만 실은 모두 엄마가 대신 써 준 것이었다. 엄마는 공부 이외의 것에 시간을 뺏기지 않도록 큰 배려를 한 것이었지만, 그건 딸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극성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외우기나 산수처럼 아주 중요한 공부인데 말이다.
흰 구름이나 그리움이니 하며 초등학생에겐 어울리지 않는 어휘로 지어진 시를 가져가면서 마치 내가 시인이 된 듯 멋있다고 착각했다. 그렇게 몇 차례 환경미화에 쓸 시를 지어 가곤 했는데,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부르더니 이번엔 꼭 네가 지어서 가져오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거다. 그동안의 시가 어른의 것인 줄.
집에 가서 엄마에게 말하니 그렇다면 아버지에게 배워서 내가 써 가라고 하신다. 아버지는 늘 어렵기만 한 분이어서 아버지가 부르자 겁이 났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동안 엄마가 써 준 시를 가져간 것을 혼낼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공범인 엄마도 아버지에게서 한 소리 들은 기억이 난다. 그건 애를 돕는 게 아니라 망치는 일이라고.
아버지는 뜬금없이 내게 ‘오늘 날씨가 어떠냐?’고 물으셨다.
‘비가 와요.’
그러자 ‘비 오는 날 학교에 가서 뭘 봤냐?’ 하신다. ‘애들이 장화를 신고 왔어요.’
‘장화가 모두 같더냐?’ 또 물으신다.
‘아니요, 색색이에요. 내건 하얀색, 어떤 아인 빨간색, 그냥 운동화 신은 아이도 있어요.’
‘그래 뭘 생각했냐?’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참 침묵하다 고민 고민 끝에 ‘신발은 모두 다른데 발자국은 색이 없어서 내 발자국 찾기가 힘들었어요.’ 했다.
‘오~~ 옳지 되었다.’
어렴풋이 시 쓰기가 쉽지 않은 것을 알았고 초등학교 꼬마에겐 시는 버거운 일이었다.
비 오는 날 운동장에
발자국이 찍혀 있네
하얀색 내 장화 빨간색 친구 장화
운동화 발자국도 찍혀 있네
비 오는 날 내 발자국 찾을 수 없네
생전 처음으로 시를 쓰고 어깨너머의 실력으로 ‘네’로 끝나는 어미를 붙이고 ‘찾을 수 없네’ 하고 아버지 앞에서 읊곤 나는 그만 앙앙 울고 말았다. 신촌의 창서초등학교 3학년 4반 교실에 오래도록 붙어 있던 나의 시이다.
이창동 감독의 ‘시’라는 영화를 봤다. 김용택 시인이 시인 교실의 지도강사로 나오고 배우 윤정희가 시를 배우는 나이 든 여자로 나온다. 삶은 고달프고 어지럽고 때론 잔인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시인은 시를 쓴다. 주인공은 시를 절대자로, 피난처로 생각을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시는 짧은 기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쓰는 수필도 나의 넋두리이자 신음이 아닐까? 신을 향한 절규라면 아주 뜨거워야 할 것이다. 간절해야 할 것이다.
밥 때도 모르고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狂 매달리는 날. 미치는及 것이 문학의 시원이며 끝일 것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쳐야 미친다는 것은 세상의 일반론이다. 하물며 문학에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