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著, 다산초당刊
가만히 있어도 불편한 삶
대학교를 골라갈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지만 장래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톡홀름에 머물고 있었기에 스톡홀름경제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경제학은 언제나 유용해서 수많은 기회의 문을 열어준다 했으니 계획이 없어도 입학하기로 했습니다. 금융과 경제를 공부해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은 아버지가 걸었던 길이었지요. 사실 입학한 진짜 이유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1985년 봄 23살에 학위를 받고, 호황이라 인재를 선점하려던 시기로 고급식당에서 중견 투자은행가와 식사하며 면접을 봤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총명한 인상을 심어주려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식사 후 면접관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분명히 다음 면접을 보러 런던 본사로 오라고 요청받을 걸세. 그런데 충고 한마디 하지. 런던의 내 동료들과 면접 볼 때는 업무에 좀 더 관심이 있는 척하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들었으나 누군가가 저를 꿰뚫어 보자 당황했습니다. 당시 저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어른이 된다는 것이 뭔지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려면 어설픈 대로 전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관심이 없는 일에도 관심 있는 시늉을 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날 밤 제 연기력이 상대 기대에 미치지 못했는가 봅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5월 어느 일요일 오후, 소파에 누워있는데 열린 창문으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거대 다국적기업의 에스파냐 지사에 근무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회사에서 지원한 차량과 비서도 있었고 출장 갈 때는 비즈니스석을 이용했습니다. 두 달 뒤에는 스웨덴 최대 가스업체인 AGA 자회사의 역대 최연소 재무담당 최고책임자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나이 26살이니 주위에서 볼 때는 성공했고 완벽한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겉보기에 성공한 사람 대부분이 결국에 깨닫게 되지요. 성공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성공과 행복은 서로 다른 것이니까요.
물질적, 직업적으로 많은 것을 이뤘으니 타인의 눈에는 제가 인생을 능숙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대학 졸업 후 3년간 6개국을 돌며 치열하게 일했지만 매 순간 엄청난 의지력과 자제력을 발휘해서 겨우 버텨낸 거였죠. 속내를 숨기고 재무관리에 관심 있는 척했습니다. 진심이 아니더라도 열심히 흉내 내면 생각보다 오래 버틸 수 있거든요. 하지만 자제력만으로는 더는 해낼 수 없는, 아니 해내고 싶지 않은 날이 옵니다.
제 경우에는 차려입고 반짝거리는 가방을 들면 마치 연극에 출연하려고 분장한 것 같았어요. 거울 앞에서 타이를 매고 엄지를 추켜세우며 ‘자 오늘도 신나게 시작해 볼까!’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렸지요. ‘기분이 별로야. 일하러 가기도 싫고 일 생각만 하면 왜 이렇게 불안하지? 마음 한구석에 늘 의심이 회오리처럼 몰아치는 것 같아 내가 준비를 제대로 했을까?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상사들이 언제쯤 나를 꿰뚫어 볼까? 내가 그냥 경제에 관심이 있는 척하고 있는 걸 언제쯤 알아차릴까?’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던 그때 그런 의심이 평소보다 더 세차게 밀려드는 것 같았습니다. 문득 대학에서 공부했던 책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대기업 재무담당자의 주요 동기는 무엇인가?’ 그 순간 제가 주주의 이익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주주를 한 사람이라도 만난 적이 있나? 설사 만났다 해도 내가 왜 그 사람들의 재산을 최대한으로 불리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하지?’
머릿속은 그 주에 처리할 업무를 생각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제 역량으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일도 있었습니다. 경영진 회의에서 마드리드 외곽 탄산 공장 증설 건에 대해 의견도 제시해야 하고 스웨덴 본사에 분기 보고서도 제출해야 했지요. 아직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일요일 오후지만 마음속에는 다가올 업무 때문에 불안이 가득해 가만히 있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떠올리던 불안과 걱정, 허탈감과 무력감으로 이어집니다. 그때 제 마음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 누워 암울한 생각만 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문득 그때 읽던 책이 떠올랐습니다. 실은 이미 세 번째 읽던 책이었지요. ‘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란 책인데 매우 난해한 내용이었습니다. 선종 불교나 모터사이클 정비기술을 담은 것도 아니고 어려웠지만 그 안에 담긴 사상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어렴풋이 이해한 한 구절을 꼽자면 ‘인간 내면의 아름다운 것, 고요하고 차분한 것, 자꾸 떠오르는 갖가지 생각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지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중하며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와 같은 것들에는 보상이 따른다.’ 몇 번을 읽다 보니 깨달음을 얻는 것 같았습니다.
좋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 떠올린 온갖 생각이 나를 힘들게 하는 거구나. 그런 생각을 차단하기란 불가능한 것 같군.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건 그냥 가짜겠지. 경영진 회의를 손꼽아 기다리는 척할 수는 없잖아? 그렇게까지 얄팍해질 수는 없다고. 내 생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책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고요함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지요? 어떻게 해야 내면의 평온함 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 있나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바로 파악할 순 없었지만 자기 안에서 평온과 고요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무척 끌렸습니다.
평온을 찾는 데 명상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명상이 실제로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아는 게 없었지만 딱히 힘들 것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 또한, 태어나 줄곧 숨을 쉬고 있으니까요. 물론 명상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제가 숨 쉬는 방법과 다르게 호흡에 관여하고 또 그 호흡을 관찰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숨쉬기를 처음 하는 사람처럼 제 호흡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제 숨을 들이마시는 거야. 다 마셨으면 다음으로 천천히 내뱉으면 돼. 다 뱉었으면 잠시 멈춰야지.’
평생 해오던 숨 쉬기지만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집중력을 유지하느라 무척 애써야 했습니다. 10분에서 15분 정도 계속하면서 호흡만을 생각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제 마음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달아났습니다. ‘경영진 회의에서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언제쯤 스웨덴에 돌아갈 수 있을까?’ ‘여자 친구가 나를 찾을까?’
시간이 흐르자 점차 마음이 조금이나마 잠잠해졌습니다. 괄목할 만하거나 종교적이거나 신비한 변화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 잠시나마 급박한 마감에 시달리지 않는 시기가 찾아왔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급류처럼 휘몰아치는 생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에 충분했지요.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겠다고 미친 듯이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됐습니다. 가슴을 짓누르던 압박이 살짝 느슨해졌어요. 갖가지 생각으로 불안해하는 사이사이에 평온을 유지하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습니다. 존재한다는 느낌에 다가가게 되었지요. 이렇게 비교적 차분해졌을 때였습니다. 제 안의 고요한 공간에서, 어떤 생각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생각이라기보다는 충동에 가까울지도 모르겠군요. 갑작스럽게 제 안에서 튀어나왔거든요.
‘앞으로 나아갈 때가 됐어.’
마음을 정하는 데 5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다 내려놓기로 마음먹자 속이 후련했지요. 그 결정은 위험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끌어 오르는 에너지가 파도처럼 밀려와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습니다. 벌떡 일어나 덩실거리며 춤을 췄습니다. 그때 제 모습은 ‘정글북’에 나오는 갈색곰 ‘발루’ 같아 보였을 거예요. 흥겹고 신이 나 있었지요. 어깨너머로 곁눈질하면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 내린 첫 번째 결정이었어요.
며칠 뒤 저는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