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著, 다산초당刊
모든 것은 너에게서 시작된다.
사랑은 터놓고 이야기하기가 무척 어려운 주제입니다. 타인을 향한 사랑이든, 자신을 향한 사랑이든 민감하긴 마찬가지예요. 우리 인간의 가장 취약한 점과 대단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사범주)을 꼽았습니다. 이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인 범천의 거주지를 뜻하는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ara) 라고도 불리는데 이 마음가짐을 온전히 갖춘 사람은 비록 속세에 몸담고 있어도 범천의 세계에 머무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 마음가짐 안에서 우리 안의 마음가짐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합니다.
거룩한 마음가짐 중 첫 번째는 자애(慈心: 자심)입니다.
두 번째는 연민(悲心: 비심)입니다.
세 번째는 희열(喜心: 희심)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고난 능력으로, 다른 사람의 성공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함께 기뻐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성공해서 행복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으로 다른 사람의 기쁨을 자기 기쁨으로 여기는 공감적 기쁨이 아닐까 합니다.
네 번째는 뜻밖에도 평온(捨心: 사심)입니다. 평온은 폭넓은 지혜를 담은 감정입니다. 흔히 알아차림이 부르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으로, 부드럽고 총명하며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모든 일이 순리대로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이 거룩한 마음가짐들, 우리 마음속의 아름다운 안식처들을 어떻게 기르고 넓힐 수 있을까요? 부처님은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게 그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너 자신부터 시작해야 하느니라.’
우리 자신에게 먼저 연민을 베풀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을 향한 연민은 더더욱 부족하고 취약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을 키우려면 우리는 애정의 방향을 내부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그 점을 간과하여 정작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판하고 가혹하게 대하며, 우리 자신도 연민의 대상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내 마음의 고통을 좀 더 공감하고 세심하게 살핀다면 삶을 더욱 멋지게 가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방비로 고통에 맞서기 전에 우리 자신에게 진심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유익하지 않을까요? ‘내가 너무 오랫동안 이런 기분에 시달리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나를 도울 방법이 있을까? 내가 좀 더 평온한 마음으로 살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머리로 해결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분 나빠하면 안 돼. 너무 쉽게 의존하고 상처받고 시기하고 분개하면 안 된다고!’라고 외치는 머릿속 생각들에 온통 주의를 빼앗겨 마음속의 조용한 목소리를 너무 쉽게 놓쳐 버립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런 식의 질책은 힘든 감정을 겪는 어떤 사람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보다는 고통의 원인을 파악해서 그것을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연민과 이해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암울한 생각에 맞설 방법을 찾아낼 수 있고 그 생각을 믿지 않는 채 빛 한가운데로 끌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좀 더 너그럽고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계속 가혹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도 온전한 사랑을 베풀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요. 때로는 그 사실을 놓치거나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 중 대다수는 거의 언제나 이로운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늘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요. 일이 잘 풀릴 때도 있고, 안 풀릴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바라볼 때 삶은 달라집니다.
우리는 태어나며 죽을 때까지 온갖 관계 중에서 단 하나만이 진정으로 평생 이어집니다. 바로 우리 자신과 맺은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연민과 온정으로 이루어진, 사소한 실수는 용서하고 또 털어버릴 수 있는 관계라면 어떨까요? 자기 자신을 다정하고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제 단점에 대해 웃어버릴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 아이들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거리낌 없이 보살핀다면 또 어떨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 전체가 반드시 좀 더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 안의 고귀한 마음가짐이 흘러 넘 칠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국의 아잔 수시토 스님이 남아프리카의 단편소설을 한 편 읽어주었습니다. 소설은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상대를 향해 따스한 관대함을 베푸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마음이 넓은 아잔 수시토 스님에게 들으니 더욱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까스로 대략 이런 말을 주절거렸던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그런 관대한 몸집만큼 소중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잔 수시토 스님이 차분하게 대답했습니다. ‘요즘에만 그런 게 아니라 항상 그렇지. 단지 전염병으로 피상적인 측면이 한 꺼풀 벗겨지면서 요즘엔 훨씬 더 분명해진 거라네.’
‘지금 제게 정말로, 진실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 상황에선 이 질문이 특별히 더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제일 먼저, 남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덜 중요해졌습니다. 예전에는 그러고 싶지 않을 때조차 저도 모르게 늘 그것부터 챙기곤 했지요.
반면에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해졌습니다. 대다수 사람이 저와 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잘 모르지요.
상황이 어땠으면 좋겠는지 또는 어떻게 될지를 곱씹는 대신 매 순간 바로 지금, 자로 여기에서 사는 것 또한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만나고 어울리는 사람의 반경 또한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이젠 저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지요. 제가 그들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그들이 확실히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자신과 좋은 친구로 지내는 것도 더없이 중요해졌습니다. 지금은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다정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에게 친절히 말해야 합니다. 기분 좋은 날 남들을 대하듯 자신에게 인내심을 발휘해야 합니다. 좀 더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다가서야 합니다.
예전에 루앙 폰 쭌이라는 이름의 현명하고 사랑스러운 스님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삶의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 유난히 치명적인 간암을 선고받았습니다. 생존 가능성이 희박했지요. 그런데도 주치의는 스님에게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 수술까지 포함된 길고 복잡한 치료계획을 제시했습니다. 의사가 말을 마쳤을 때, 스님은 함께 온 승려에게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의사는 죽지 않나 봐?’
저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제 심금을 울렸거든요.
왜 우리 문화권에서는 죽음과 싸우고,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을 부정하는 것을 영웅적이라고 묘사할까요? 죽음은 왜 늘 무찔러야 할 적이나 모욕으로, 실패로 그려질까요? 저는 죽음을 삶의 반대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탄생의 반대에 더 가깝지요. 증명할 순 없지만, 저는 늘 죽음 저편에 뭔가가 있다는 확신을 느껴왔습니다. 때로는 뭔가 경이로운 모험이 저를 기다린다는 느낌마저 들어요.
숨을 거둘 날이 오면 그날이 언제든 저더러 싸우라 하지 마세요. 오히려 제가 다 내려놓을 수 있도록 어떻게든 도와주길 바랍니다. 제 곁을 지키며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세요.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들을 다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때가 됐을 때 제가 늘 원했던 끝이 어떤 것인지 기억할 수 있도록 당신의 열린 손바닥을 보여주세요.
엘리사베트, 그대 아직 내 곁에 누워있지 않다면 얼른 침대에 올라와서 나를 안아주구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봐요. 내가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게 당신의 눈이었으면 좋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