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가 이철수의 坐脫(좌탈)
저자는 序文(서문)에서
내가 읽은 책들은 나의 도끼였다. 나의 얼어붙은 감성을 깨뜨리고 잠자던 나의 세포를 깨우는 도끼, 도끼 자국들은 내 머릿속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어찌 잊겠는가?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쩌렁쩌렁 울리던, 그 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시간이 흐르고 보니 얼음이 깨진 곳에 새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촉수가 예민해진 것이다.
본사 讀書狂(독서광)중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기술개발실 이 차장에게 요즈음 볼만한 책이 없을까 하고 물으니 ‘책은 도끼다’라는 책을 추천해 줬습니다. 장르에 무관하게 이러저러한 책을 읽지만 제목이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책입니다. 저자인 ‘박웅현’, 유명 작가는 아니고... 희한하고도 기괴한 제목의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작가는 광고 카피라이터군, 아~하! 그래서 책 제목을 눈에 띄게 작명했구나, 유명광고도 만들었고, 가끔 인문학 강의도 하고...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자가 서문에서 이야기한 ‘책은 도끼다’라는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시한 짧고 간결한 문장들은 도끼로 머리를 맞은 듯 충격적이었으며, 예리하게 벼린 날카로운 비수처럼 나에게 다가와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을 후볐습니다. 자, 이제 도끼 혹은 비수 같기도 한 책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판화가 이철수의 坐脫(좌탈): 좌탈은 스님들이 앉은 상태로 解脫(해탈), 涅槃(열반)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판화에는 앉아계신 노스님 앞에 작은 찻주전자가 놓여있고 염주는 실이 풀려 염주 알이 흩어져 있습니다.
염주 끈이 풀렸다
나 다녀간다 해라
먹던 차는
다 식었을 게다
새로 끓이고,
바람 부는 날 하루
그 곁에 다녀가마
몸조심들 하고
기다릴 것은 없다
몇 번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철수 씨 책을 본 적은 없으나 저자의 깊은 內工(내공)이 짧은 문장에서 느껴집니다. 편히 앉아서 차를 드시는 시간... 그 사이 스님은 열반에 드셨고 차는 식었습니다. 스님에게는 생명과 같은 염주 끈이 풀렸으니 이승에 태어나 저승으로 떠나가는 代喩的(대유적) 표현이 기가 막힙니다.
노스님의 잔잔한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떠나니 주위에 알리고 어느 날 불현듯 다시 올 테니 그동안 잘 살고 있거라. 시와 같이 간결한 문장으로 어떻게 열반에 든 노스님의 모습과 과정, 추후에 환생을 하겠으니 그간 몸조심하고 法力(법력)을 쌓고 있어라 하는 후배스님들에 대한 애정 어린 잔소리와 불교의 輪廻思想(윤회사상)까지를 어떻게 한 장의 판화와 짧은 글로 표현했을까요? 도끼로 머리를 때리고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 표현력입니다. 책에 소개된 도끼 같은 몇 구절을 옮겨 보겠습니다.
화단에서는 군데군데 꽃이 눈을 떠, 깜짝 놀란 소리로 “빨강!”하고 외쳤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 줄 수 있는 사람이다.(알랭 드 보통)
고은의 시집“ 순간의 꽃”에 나오는 짧은 시
1. 엄마는 곤히 잠들고
아기 혼자서
밤기차 가는 소리 듣는다
2. 저쪽 언덕에서
소가 비 맞고 서 있다
이쪽 처마 밑에서
나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둘은 한참 뒤 서로 눈길을 피하였다
3. 함박눈이 내립니다
함박눈이 내립니다 모두 무죄입니다
4. 어쩌란 말이냐
복사꽃잎
빈집에 하루 내내 날아든다
5. 방금 도끼에 쪼개어진 장작
속살에
싸락눈 뿌린다
서로 낯설다
後記) 판화가 이철수 씨의 글과 그림에 도끼로 난타 당해 책을 사려했더니 絶版(절판)되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홈페이지가 있어 바로 가입을 했습니다. ‘이철수의 집’... 아... 인터넷... 살기 좋은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