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빙고 호텔 방법처럼...
제목 보고 낚였다는 분들이 계실까 봐 서빙고 호텔 이야기는 러브호텔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모두에 밝힙니다. 아래 이야기는 소재가 다르지만 작년도에 게시했던 ‘하우석의 100억짜리 기획노트’ 후편입니다. ‘기술업무 기획은 어떻게 해야 하나?’ 또는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 ‘100억짜리 기획노트’, ‘서빙고 호텔’입니다.
참고로 西氷庫(서빙고)는 조선시대에 얼음을 보관해 두는 서쪽창고라는 뜻입니다. 氷庫는 삼국시대에도 있었다고 알려집니다.
저는 특이하게 호텔에서 군 생활을 했습니다. 5공 초창기 출신성분(학생시절 데모경력이 없는 것)이 좋았고 전기공학을 전공했다고 보안사령부 변전실에 배치되는 것으로 훈련소에서 차출되어 경복궁 앞 보안사령부에서 대기병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일이 꼬이는 바람에 장발의 검은 가죽점퍼 차림을 한 사람들에게 어디론가 끌려갔습니다.
건물이 서울 서빙고동에 위치해 있고 감방이 있어서 서빙고호텔이라 불리는 安全家屋(안전가옥: 흔히 安家라고 하지요)은 대공용의점이 있는 사람(간첩)들을 取調(취조)하는 곳입니다. 제가 끌려간 安家의 정식명칭은 保安司令部 對共處 搜査課 分室(보안사령부 대공처 수사과 분실)입니다. 요즈음은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남영동 분실’과 10.26 사태가 발발한 ‘궁정동 안가’가 있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아직까지 내부가 공개된 적이 없을 정도로 비밀스러운 곳이니 그 당시만 해도 서빙고호텔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는 곳이며 지구상에는 존재하고 있지 않은 공간이었습니다.
호텔에 도착해서 끌려간 곳은 사방 벽과 바닥에 선지색 검붉은 타일이 부쳐진 밀실로 그곳에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흐릿한 조명, 음습한 분위기, 퀘퀘한 냄새, 속을 뒤집을 만큼 기분 나쁜 타일 색상... 추후에 그곳이 고문실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물고문하기 좋게 바닥에도 타일을...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한 것은 아니었으나 서빙고호텔에서의 추억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제대 후에 제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서빙고호텔 기억을 지워버리려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보고 배운 것들이 지금 업무스타일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공처 주요 업무가 간첩 잡는 일이고 잡힌 간첩을 취조하는 장소가 서빙고호텔인데 취조가 끝나도 보안사에서는 간첩 검거사실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내부적으로 보고하고 언론발표를 미루다가 학생들이 데모하고 민주화 요구가 빗발치는 등 시국이 어수선해지면 카드를 하나 꺼냅니다. ‘유학생 간첩단 일망타진’ 몇 개월 전에 쟁여놓은 사건을 한건 꺼내 정국을 反轉(반전)시킵니다. 순식간에 管制言論(관제언론)들은 民主化(민주화)가 우선이 아니라 反共(반공)이 우선이라는 여론을 형성시킵니다. 한동안 잠잠하던 정국이 어수선해지면 쟁여 놓은 카드를 또다시 꺼냅니다. ‘재일교포 간첩단 일망타진’...
서빙고호텔과 北風工作(북풍공작)은 30년 전인 5공 초기 때나 가능했던 일입니다. 요즈음은 이런 식으로 정치에 이용하면 여론과 야당의 역공을 받아 더욱 난처해지겠지요.
제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지 모르겠으나 기술개발실 식구들에게 몇 개월 앞을 보고 일 해야 하고 일상 업무들은 최소한 일주일 치를 앞당겨 놓아야 한다고 잔소리합니다. 그래야만 업무에 휘둘리지 않고 업무를 장악하게 된다. 특히 본사 업무는 정례적으로 벌어지는 일은 아르바이트로 하는 것이고 돌발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에 시간을 빼앗길 가능성이 많으므로 업무를 앞당기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 사람이니 컨디션난조로 일을 못하는 날도 있고 개인적인 일이 발생될 수 있으므로 일주일치 업무를 앞당겨 놓는 것은 필수적이다. 또한 눈앞에 닥친 업무들이 없어야 마음이 여유롭게 되고 창의적인 생각이 용솟음친다. 당면한 업무들이 많을 때는 창의적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눈앞의 업무를 처리하기에도 급급해진다.
나이 들어가니 잔소리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 같습니다.
입사해서 제가 행하는 업무스타일을 보면, 싫어했고 기억을 지우려 애를 썼던 예전 서빙고호텔이 써먹던 수법을 그대로 踏襲(답습)하고 있습니다. 서빙고에서도 쟁여놓은 간첩들이 없었다면 사령관으로부터 빨리 간첩 잡아들이라는 독촉이 있었을 테고 수사관들은 무리수를 두게 되어 괜히 애먼 사람을 잡는 일이 생길 수가 있으니까요. 추후에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었다는 보도를 봤으나 제가 근무할 때가 아니라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업무에 휘둘리지 않고 업무를 장악하려면 꾸준히 공부하여 담당분야에 대한 전문가적 지식도 쌓아야 하겠지만, 자잘하고 정례적인 업무들은 일주일정도 앞당겨 처리해 놓아야 업무 질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빙고 호텔 방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