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리석었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집에 새 식구가 생겼습니다. 푸들을 입양했는데 까만색이라 이름이 ‘콜라’입니다. 아이들은 하얀색 푸들도 입양해서 ‘사이다’라고 이름을 지어주자고 하지만 두 마리 키울 자신은 없습니다. 앞뒤로 까매서 얼굴인지 알고 쓰다듬으면 엉덩이고, 엉덩이들 토닥여준다고 했는데 얼굴입니다. 새 아이를 키우게 되어 아가 엄마가 된 집사람에게 ‘엄마수업’이란 책을 권했는데 도움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백지상태와 같아 한국말을 들으면 한국말을 하게 되고 영국에 있으면 영어를, 일본에 있으면 일어를 하게 됩니다. 돼지우리에 있으면 돼지흉내를 내고 늑대무리에 있으면 늑대처럼 행동합니다.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는 엄마가 키워야 합니다. 아기는 키우는 사람을 닮게 되므로 나를 닮아야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副次的(부차적)인 존재로 아이엄마에게 잘해서 엄마가 아기를 잘 키우도록 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세 살 때까지는 아이위주로 키워야 합니다. 그 이후에는 배우자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이에게 좋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전근 가면 무조건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중심에 놓고 부부가 갈라지면 가정의 화목이 깨지고 아이가 망가지게 됩니다. 가정을 평안하게 만든 다음에 주위에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이웃집 아이도 귀엽게 생각하고 이웃집 노인도 좋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가 공손해 지기를 원한다면 아내가 남편에게 공손해야 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행동을 보고 따라 합니다. 밥을 먹으면 따라먹고 욕하면 따라서 욕을 합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사춘기를 넘어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어린애 짓을 합니다. 부모가 아이의 자립기회를 막아서 그렇습니다. 부모는 사랑을 준다고 한 것인데 아이가 해야 할 일을 부모들이 대신해서 하니 독립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춘기 때는 부모가 지켜봐 주면 됩니다. 넘어지고 자빠질 때마다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봐 줘야 합니다. 지켜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안쓰러워 일으켜 세워주기를 반복하면 아이들은 홀로 서지 못합니다. 대학 가는 것도 부모가 선택하고, 결혼도 부모가 짝을 맞춰주고, 집도 사주고, 애도 키워주고 이혼하면 아예 손자를 데리고 옵니다. 그 果報(과보)로 아이들은 나약해지고 부모는 늙어서 까지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옛날에는 어릴 때 보살펴주지 못한 대신 사춘기 때 간섭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교육전문가였기 때문이 아니라 간섭할 시간이 없었던 것인데 그때의 아이들은 홀로 자립을 해서 지금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사랑은 세 단계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랑은 아이가 어렸을 때 정성 들여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는 사랑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사춘기 때 간섭하고 싶은 마음 즉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면서 지켜봐 주는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성년이 되면 부모가 자기 마음을 억제해서 자식이 제 갈 길을 가도록 일절 관여하지 않는 냉정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엄마들은 헌신적인 사랑이 많고 지켜봐 주는 사랑과 냉정한 사랑이 부족합니다. 옛 말에 아들을 낳아 머슴살이를 시키면 부모를 봉양하며 효자가 되고, 논 팔아서 대학공부를 시키면 불효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학원 졸업하고 외국 유학까지 갔다 온 자식이 ‘엄마, 저 무슨 일을 하면 좋겠어요?’
‘아이고, 네 인생 네가 살지 내가 어떻게 알겠니. 공부 많이 한 네가 알지 엄마는 모른다.’ 이렇게 정을 딱 끊어야 합니다.
고등학교 휴학 중인 학생과 면담을 했는데 학생이 말하길
어릴 때부터 남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성격적으로 완벽주의자입니다. 그러다 보니 욕심만큼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불만이고 불안을 느낍니다. 좋은 학교에 입학해도 그 기쁨은 잠시뿐일 것 같은 허탈감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처럼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역사, 민족, 통일, 환경, 평화에 기여하고 싶은데 막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은 어떤 계기로 그런 일들을 추진했고 어떤 생각으로 추진해 나가시는지 궁금합니다.
학생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남의 인생에 신경 쓰지 말고 네 인생이나 잘 살아라.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비교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따라갈 힘이 부치면 自愧感(자괴감)이 생긴다.
공부를 안 하고 성적이 오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부모들은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의사, 변호사를 시키려고 합니다. 삶의 목표가 있어서, 재능이 있어서, 관심이 있어서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이 버는 것이 최대의 목표입니다. 돈을 벌려고 의사를 하니 과잉진료를 하고, 돈 벌려고 변호사를 하니 부정부패와 연루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변호사는 돈을 벌지 못합니다. 대기업의 탈세를 도와주는 변호사는 몇 백억을 법니다. 돈을 좇다 보면 못된 짓을 하게 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집니다. 가난한 사람, 공부 못하는 사람, 재주 없는 사람 때문에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천 배 했다, 1만 배 했다 자랑삼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면서 慙悔(참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절을 3천 번 하는 것보다 마음을 한번 숙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절을 하고 경전을 읽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리석었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마음을 숙이는 것이 1만 배 보다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