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著, 저녁달刊
행복이란 무엇인가
왜 유학 떠나는지 아세요? 사실 한국에서도 그렇게 공부하면 모두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른 나라에 가면 갑자기 비장해지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거 같아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되거든요.
저도 한국에서 대학원 다닐 때 좀 놀기도 했는데 유학 가서는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죽어라 공부만 했습니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크리스마스이브에도 공부했기에 우리나라 지도교수님 같으면 당연히 말씀하셨을 겁니다. ‘열심히 하네 대단해.’
그런데 유학시절 제 지도교수님은 그런 저를 보면서 걱정되었는지 ‘경일, 네가 미국에서 이렇게 공부하면서 보내는 이 오늘, 하루하루도 네 인생에서 마땅히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날들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멍해졌습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다는 표현도 그때 느꼈죠. 교수님이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오늘은 집에 빨리 들어가서 가족들이랑 맛있는 거 먹고 푹 자도록 해. 그렇게 3일 정도 지내다가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굉장히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왜 사세요?’
‘행복해 지려고요.’
직장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일하세요?’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요.’
연세대학교 서은국 교수님이 ‘행복의 기원’이란 책을 쓰시면서 저한테 이런 얘길 하셨어요. ‘내가 지금까지 행복에 관련된 이야기를 참 많이 했지만 사실은 이 책에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어요.’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였는데요?’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는 거예요. 행복은 도구예요. 행복이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나 생을 마감하는 어느 순간에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 오늘 하루하루에도 마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행복은 달려가면서 인고해야 하는, 그래서 끝내 어느 순간에 만나야 하는 목표가 아니에요. 오늘 하루하루 우리가 소소하게 느껴야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언제 그 지점이 오는지도 모르는데 행복이라는 걸 멀리 밀어냅니다. 행복은 늘 저기 어딘가 멀리 있어요. 20년, 30년쯤 행복하지 않고 고통을 참아가며 인고의 세월을 거치면 그날이 올 거라고,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은국 교수님은 그 생각이 너무 어리석다고 말했고, 제 지도교수였던 마트 마크먼 교수님도 제 행동을 보고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바로잡아주었습니다.
물론 오늘을 쾌락만 탐닉하며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하지만 먼 미래, 기약도 없이 뜬구름 같은 행복을 위해 오늘하루를 지나치게 고통스럽게 살고, 인고의 세월을 참아내면 먼 훗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명백한 착각이라는 말씀을 분명히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 머릿속에선 아마도 몇 년 만 참으면 분명 지금보다 큰 행복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냐는 의문이 맴돌고 있을 겁니다. 고등학교 3년을 잘 참으면 좋은 대학에 가고, 직장에 취직해 10년 동안 돈을 아끼고 모으면 집을 장만할 수 있고, 직장에서 보기 싫은 사람도 잘 참고 견디면 언젠가 그만한 보상이 오는 것 아니냐고, 실제로 그런 사례를 주변에서 많이 봤다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주관적 안녕감이라는 이름 아래 행복 연구를 주도한 심리학자 에드 디너 교수가 강조하는 행복의 법칙입니다.
백 점짜리 행복을 열흘에 한 번 느끼는 사람과 10점짜리 행복을 매일매일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의 총합은 둘 다 100점이니 똑같이 행복할까요? 연구에 따르면 총합은 같아도 10점짜리 행복을 매일매일 느끼는 사람이 훨씬 더 오래 건강하게 오래 살았습니다.
실제로 행복의 총량은 0에 수렴합니다. 좋았던 날도 있고 우울한 날도 있고 들쭉날쭉하니 기분으로서의 행복은 결국 0에 수렴합니다. 365일 즐거운 사람을 조증환자라 하고 반대면 우울증 환자라고 하죠. 감정이 극단적이지 않고 안정적인 삶들은 총량이 0에 가까워집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행복의 크기가 한번 크게 올라갔다가 쑤욱 내려오면 행복의 크기가 크더라도 빈도는 한 번입니다. 그런데 작아도 여러 번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면 행복이 많아지는 겁니다. 행복을 자주 느끼는 거죠. 이런 경우가 사람에게 훨씬 좋은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작은 행복을 누리는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해요. 나한테 알사탕을 주는 친구가 열 명 있으면 나의 행복 빈도는 10번 이상이 되겠지요. 나에게 1억 원을 흔쾌히 내어주는 친구가 한 명밖에 없으면 행복의 크기는 커지지만 빈도는 낮아져요. 알사탕 한 개줄 능력밖에 없는 친구라도 10명 있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행복에 관련된 연구를 하다 보니 인간관계도 행복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한테 큰 것을 주지 못하더라도 작은 것을 기꺼이 줄 수 있는 친구들이 주위에 있는 것, 주변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를 계속하던 중에 더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과 창의성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변에 작은 행복을 주는 사람들은 창의적으로 살고 이 세상을 바꿀만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관계주의가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창의적인 것 좀 갖고 와봐.’ 이러면 못 가져오는데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줘.’라고 하면 그때 어마어마하게 창의적으로 변합니다. 심지어는 밀접한 사이가 아닌데도 그래요.
이렇게 남을 돕는 것, 이타성이 창의성을 발현시키는 요소가 됩니다. 이타성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어떤 일에 참여할 여지를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접근방식을 바꾸게 되는 과정에서 창의적인 능력이 길러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타적인 사람,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더 창의적인 겁니다.
이 타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면 지금은 손해 보겠지만 언젠가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사소한 하나’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행복빈도가 높아지겠죠. 내가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있지 못할 때 가볍게 훈수를 두고 가기도 합니다. 그 사람한테는 큰 게 아니지만 나는 행복의 빈도가 높아집니다.
여러 심리학 연구를 살펴보면, 행복한 사람은 이타적인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행복한 사람에게 더 친절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높고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해요. 그렇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행복해지고, 그 행복해진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이타성과 행복의 순환 고리가 만들어집니다.
나의 인간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고 나를 경쟁자로 보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언젠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나에게 작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혹은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 어떨까요? 나의 작은 이타적인 행동이 복잡한 인간관계 문제를 풀어줄 실마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