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5.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著, 세계사刊)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최근 에세이 두 권을 읽었다. ‘그러라 그래(양희은著)’는 2021년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였으며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박완서著)’는 2022년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였다. 역시 양희은 씨는 노래를 잘하고 박완서 선생님은 글쟁이다.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巨匠(거장)은 수필도 660여 편을 쓰셨다. 巨匠의 수필은 대단한 내용이 아니라 일반인이 겪는 일상의 소소하고도 담백한 이야기지만 전체 구성과 문체는 남달랐다. 作故(작고) 후 수필가이자 언론인이셨던 따님이 선별한 에세이집이다.

* 원문 일부만을 편집해서 올렸다. 巨匠의 작품을 발칙하게도...


유쾌한 오해

지하철 2호선, 내 옆자리가 비자 앞에 서 있던 청년을 밀치고 뚱뚱한 중년남자가 잽싸게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넉넉하던 자리가 꽉 차면서 내 치맛자락이 그 밑에 깔렸다. 약간 멋을 부리고 나간 날이라 나도 눈살을 찌푸리면서 치맛자락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꼼짝도 안 했다. 여간 무신경한 남자가 아니었다.

나는 별수 없이 그 남자를 톡톡 치면서 내 치맛자락이 그의 엉덩이 밑에 깔린 걸 알려주었다. 그제야 몸을 조금 들썩했을 뿐 미안하단 말 한마디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워낙 뚱뚱해서 반소매 밑으로 드러난 끈끈한 팔로 양쪽 사람을 밀치는 듯한 그의 자세 때문에 여간 거북하고 불쾌하지가 않았다. 일어나 버릴까도 싶었지만 갈 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고, 승객은 자꾸만 불어나고 있었다.

그가 큰 소리로 하품을 했다. 남이야 그러건 말건 그는 자기 집 안방처럼 거침도 없고 눈치도 없었다.

나는 그런 남자 옆에 앉아 있다는 불쾌감을 잊으려고 방금 탄 젊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부가 맑은 수수한 여자였는데, 아주 화려한 모자를 들고 있었다. 차양이 달린 하늘색 모자였는데, 차양 위에는 금줄이 든 순백의 프릴이 달렸고 망사베일까지 늘어진, 좀처럼 시중에서는 보기 드문 환상적인 모자였다. 그 여자가 쓰기엔 너무 작았고 인형의 모자치고는 너무 크고 정교했다. 그 모자를 들고 있음으로써 그 여자는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모자가 아니라 액세서리인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내 옆에 앉았던 그 무신경한 남자가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모자를 든 여자에게 손짓했다. 자리를 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남자도 그 여자가 보기 좋았던 듯했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여자에게 아부를 하다니, 오십도 넘어 보이는 남자가 20대의 젊은 여자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은 암만해도 부자연스러워 보였고 흑심까지 있어 보이는데도 남자는 그 방면에도 여전히 무신경했다.

마땅히 사양할 줄 알았는데 여자는 고개만 까딱하고 얼른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나는 그 여자가 만삭의 몸임을 알았다. 화려한 모자에만 정신 팔려 모르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그 여자에겐 세 살쯤 되어 보이는 깜찍한 딸도 딸려 있었다.

자리에 앉은 여자는 딸을 끌어당겨 무릎에 앉혔다. 그 여자는 딸에게 모자를 씌우지 않고 여전히 들고만 있었지만, 그 환상적인 모자를 쓴 여아를 상상하는 건 뱃속이 간지럽도록 즐거운 일이었다.

더 즐거운 건 내가 여지껏 그 뚱뚱한 남자를 공연히 미워하고 오해한 게 풀려서였다. 그 남자가 뻔뻔하고 무신경하다는 건 순전히 나의 오해였다. 다시 한번 쳐다본 그 남자는 듬직하고도 근사해 보였고 매우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한 몸이 자리를 내줌으로써 세 식구를 앉힐 수가 있었으니 흐뭇할 수밖에.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나보다는 착해 보이는 날이 있다. 그날이 그런 날이었고, 그런 날은 살맛이 난다.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그리고 매일매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5년 전 아들을 앞세우고 나서부터이다. 그전까지는 사람은 다 죽으니까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 하는 것 이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들을 잃자 따라 죽고 싶었다. 정말 살고 싶지 않았고, 죽을 방법도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아파트에 사니까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기만 해도 실패 없이 죽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무서워서 못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모질지 못하다는 걸 깨달은 다음에 내가 절실하게 바란 건 슬픔을 참지 못해 서서히 저절로 죽어지는 거였다. 그것만은 가망이 있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 기력이 쇠진하고 마음속에 아무런 뜻이 없으니 곧 죽게 되겠거니 속으로 묘한 희열을 느끼면서 기다렸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석 달이 안 된 어느 날 느닷없이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하게 코에 와닿았다. 살 의욕이 없이 어떻게 식욕이 생겨날 수가 있는지, 나는 짐승 같은 나의 육체에 모멸감을 느꼈지만 결국은 식욕에 굴복하고 말았다.


인간의 목숨이란 이렇게 치사하다. 慘慽(참척: 자식이 먼저 죽는 일)의 고통은 인간이 질 수 있는 고통의 무게의 극한이다. 정말로 죽고 싶었던 것도 죽음만이 그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기 때문이다. 그게 여의치 않자 그다음엔 저절로 죽어지려니 했던 것도 그 고통의 무게에 압사당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 만큼 나를 강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각자가 질 수 있는 것 이상의 고통은 결코 주지 않는다는 말은 역시 맞는 말이었다. 아직도 이렇게 살아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죽음은 나에게 희망이다. 그 못할 노릇을 겪고 나서 한참 힘들 때, 특히 아침나절이 고통스러웠다. 하루를 살아낼 일이 아득하여 숨이 찼다. 그러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는 하루를 살아낸 만큼 내 아들과 가까워졌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저만치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죽음과 내 아들과의 동일시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면 요새도 가슴이 설렌다.

그렇다고 나는 죽음이 조금도 안 무섭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 될 것 같다. 육신의 고통을 심하게 받다 죽는 사람을 보면 앞으로 죽을 일이 무서워진다. 하여 내가 기도 끝에 빠트리지 않는 간청은, 남들이 아깝다 할 나이에,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잠자듯, 저 세상에서 보기엔 소풍에서 돌아오듯 선종하게 해 달라는 소리이다. 하느님 들으시기엔 큰 부자나 권력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 훨씬 외람되고 욕심 사나운 소리로 들릴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응석을 부려본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안 죽는 것이다. 너무 오래 살아 혈육이나 친구 중 젊은 사람이 죽는 걸 보아야 하는 순서 바뀐 죽음처럼 무서운 건 없다. 한 번 겪어보니 그 고통이 얼마나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오래 살면 행여 또 그런 일을 당할까 봐 그래서 어서 죽고 싶은 것이다. 나이 순서대로 죽게 된다면 세상에 무슨 걱정 있을까도 싶지만, 그렇게 되면 산다는 것이 죽음 앞에 늘어선 무력하고 긴 줄서기하고 무엇이 다를까. 오늘만 살 줄 알고 내일 죽을 줄 모르는 인간의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만약 인간이 안 죽게 창조되었다면 생명의 존엄성은 물론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창조적인 노력도 필요 없게 된다. 자식을 창조할 필요도 없다면 사랑의 기쁨인들 있었으랴.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듯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것인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