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이 짧은 곳에 서라고 권합니다. (최재천著, 샘터刊)
이 책은 청소년 추천도서지만 어른들 세계에서도 통하는 문장이 있어 소개드립니다. ‘줄이 짧은 곳에 서라고 권합니다.’
입사 후 퇴직할 때까지 35년간 비주류였습니다. 전기공학 전공자가 많을 줄 알았으나 가계전공자가 주류였기에 자연스레 비주류가 되었습니다. 원자력발전소 초창기라 영어 할 수 있는 사람은 품질관리부서로 배치되었습니다. 비주류 중의 소수가 되었습니다. 본사로 스카우트된 후 기술기획, 교육기획, 안전관리, 원자로 폐로 등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서 근무했습니다.
새로운 분야, 소수들만 근무하는 낯선 분야가 그리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입사 후 짧은 줄에 서게 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하지만 독특한 커리어로 인해 해당분야에서 쉽게 인정받으며 전문가 흉내를 냈었죠.
여는 글: 아름다운 방황을 하라.
귀양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노래했습니다. 역사를 훑어보니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구암 허준선생님 등 大學者(대학자)들은 한결같이 유배지에서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내셨더군요. 현업이 너무 바쁘면 깊이 있는 연구와 집필이 쉽지 않습니다.
얼마 전 진짜 충남 서천으로 유배를 당했습니다. 국립생태원초대원장이 되어 그토록 원하던 귀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어쩝니까? 예전보다 더 바빠졌습니다. 이래저래 大學者가 되긴 글렀나 봅니다.
귀양 가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은 생태학 교과서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생태학자들은 자연 생태계의 관계를 흔히 경쟁, 포식, 기생, 공생 네 종류로 나눕니다. 기본적으로 서로 해가 되는 관계가 경쟁이고 서로에게 득이 되는 관계가 공생입니다. 한 종은 이득을 보고 다른 종은 손해 보는 관계는 포식 또는 기생이라 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경쟁을 다른 관계들과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하는 것은 지나치게 평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걸 원하는 존재들은 늘 넘쳐나는 상황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입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은 상대를 제압하는 것 외에도 포식, 기생, 공생 등을 고안해 낸 겁니다. 자연의 관계구도를 이처럼 입체적으로 조망하면 나를 둘러싼 모든 상대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지금 지구상의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지주는 벼, 보리, 밀, 옥수수 등 곡류 식물입니다. 불과 1만 년 전만 해도 들판의 잡초에 불과하던 그들은 인간이 경작해 주었기에 대지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불과 25만 년 전에 등장해 사자와 하이에나에게 쫓기던 하잘것없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등극한 것은 대규모 공생사업을 벌여 성공한 데 기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과 더 이상 상관없이 사는 존재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인간은 자연이 창조해 낸 가장 위대한 걸작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먼 훗날 우리가 멸종한 다음 또 다른 지적 동물이 ‘인간실록’을 편찬한다면 ‘스스로 갈 길을 재촉하며 짧고 굵게 살다 간 동물’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습니다.
침팬지연구의 대가 제인 구달은 학자로 독립하려면 박사학위가 필요했답니다. 인류학자 루이스 리키 박사 주선으로 캠브리지 대학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첫자리에서 모든 연구가 틀렸다는 호된 비판을 받았습니다. 침팬지에게 번호를 붙여야 하는데 이름을 붙였으며 인간처럼 감정을 가진 것같이 기록한 것이 비과학적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구달 박사가 열어젖힌 길을 따라 돌고래, 까마귀와 까치, 딱히 두뇌랄 것도 없는 문어에 이르기까지 동물의 개성과 감정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헤쳐 나가는 일이 쉽지 않지만 그만큼 멋진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남들이 다 가는 길로 가지 말고 나만의 길을 개척하기 바랍니다. 장래 어떤 직업, 어떤 전공을 택할지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줄이 짧은 곳에 서라고 권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기획하려면 적어도 20년은 내다봐야 합니다. 대개 40대 초반까지 가장 활발하게 일하니까요. 지금 잘 나가는 분야는 지원자가 많을 것이나 사회변화가 빠른 시대에 20년 후에도 인기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운 좋게 유지되어도 긴 줄에 서있는 다른 이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좋아하는 분야의 줄이 짧다면 기뻐하세요. 운 좋게 그 분야가 각광받는다면 졸지에 최고 권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도 흔들리지 마세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굶어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악착같이 찾으세요.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자연계에서 무게로 성공한 생물은 꽃피는 식물입니다. 식물 전체의 무게에 비하면 고래, 코끼리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숫자로 성공한 생물은 곤충으로 무게와 숫자로 막강한 생물집단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공생이었습니다. 꿀과 꽃가루를 나누며 양쪽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서로 물고 뜯고 상대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꽃과 벌, 개미와 진딧물 모두 손을 잡은 생물들은 이기고 있습니다.
숙제만 하고 출제는 못 하는 대한민국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출시하는 무대에 두 개의 이정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기술(Technology), 또 하나는 인문학(Liberal Arts)으로 아이폰은 ‘기술’과 ‘인문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아이폰은 세상을 바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 발로 기어 들어가 앱을 만들어 올리고,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찰스가 대단한 것은 ‘이 기계를 만들어 내면 그 안에 새로운 세계와 사회가 구성될 것이다.’를 예측했다는 겁니다.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만들어 냈기에 다른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휴대전화를 잘 만듭니다. 디자인도 예쁘고 성능도 좋아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이런 휴대전화 한번 만들어봐라.’는 잘하지만 출제는 못하고 있습니다. 애플이 출시하고 나면 비슷한 것을 만들고 구시렁댑니다. ‘속도는 우리가 더...’ ‘해상도는 우리가 더...’
‘아바타’ 제작에도 한국인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가 여럿 참여했습니다. ‘전 세계 애니메이션은 대한민국이 그린다.’라고 하지만 결국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내준 숙제내면 그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숙제하는 우리들 주변에도 출제하는 사람이 나타나야 합니다.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학문의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넘나드는 스티브 잡스, 제임스 카메론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골치 아프고 난장판을 만들지만 그들이 만든 난장판 속에 다음세대의 먹거리가 발견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