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야, 김광균
혼자 술잔을 두 개 놓고 자리를 옮겨 다니며 주거니 받거니 혼자 대화하는 奇人(기인)도 있기는 하지만(가수 김건모 씨) 말 통하는 사람이 있어야 대화가 이루어지며 마음 통하는 사람들과는 말이 없어도 눈빛으로 대화가 가능하다. 고등학교 동창들은 30년 넘은 친구들이니 척하면 삼천리요, 쿵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라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며 말하지 않아도 속사정을 알고 있기에 말없이도 대화가 가능하다.
開拓敎會(개척교회) 목사인 고등학교 동창은 신도가 없어 썰렁한 교회당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지난주에는 왜 교회에 오지 않았냐고 물어본 적이 없다. 졸지에 父親喪(부친상)을 당해 매주 제사를 지내느라 두 달여를 빠진 친구에게조차 그것은 敎理(교리)에 어긋나니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도와 목사님과의 관계 이전에 집안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기에 가끔씩 대폿집에서 나누는 대화도 종교적인 이야기보다는 아이들 키우고 병약하신 부모님 供養(공양)하는 그저 그런 우리 세대에서 흔히 하는 살아가는 이야기들이다.
斗酒不辭(두주불사)였으며 양조장집 막내아들이었던 목사님은 사이다로 건배를 하지 술은 하지 않는다. 동창들과의 만남은 항상 친구들 이야기가 술잔에 쌓이고 훈훈한 이야기는 목을 타고 넘어가 몸을 덥히며 얼굴에 紅潮(홍조)를 만든다.
좀처럼 약속하기 어려운 후배가 술자리에 초대했다. 매일 두세 차례 메신저를 통해 대화를 해왔고 共有(공유)하고 있는 가치들이 많아 off-line 대화를 원하던 차라 두말 않고 초대에 응했다. 누가 참석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초대를 받아 소풍 가는 날 또는 선보는 날과 같은 설렌다. 약속장소에 나가보니 참석한 사람들이 私席(사석)에서 한두 차례 만나고 이야기 나눴던 분들이라 후배 안목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후배를 媒介體(매개체)로 하여 술자리에 참석한 분들과의 대화도 그리 막히는 대목이 없었으니 類類相從(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그날 분위기는 술 먹지 않아도 취하는 분위기이므로 취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으나 애쓴 보람은 없었다. 대화 상대와는 취미, 연배가 비슷해야 소통이 원활하지만 가치관이나 指向點(지향점)이 비슷하다면 연배 차이는 무관한 것 같다. 그날은 대화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사람들 매력에 취하는 날이었다.
30년도 넘었을 어느 겨울날 종로통 선술집에서 친구들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論爭(논쟁)이 붙었다. 바퀴벌레가 과연 날 수 있을까? 하는 논쟁만큼 가치 없는 대화이지만 사소한 일에도 목숨 거는 시기였기에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새벽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
계곡의 맑은 시냇물 소리
귓가를 스치는 봄바람소리
별빛, 달빛이 쏟아지는 소리
...
여러 가지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의견이 나왔으나 멀리서 들리는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他意(타의)에 의해서 결론지어졌다.
우리들의 가치 없는 논쟁을 듣고 있던 옆 테이블의 얼굴도 모르는 선배가 조금은 挑戰的(도전적)으로 질문을 했다.
‘그 여인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던가?’
‘분위기상 貢緞(공단: 두껍고 무늬가 없으며 윤기 있는 고급 비단) 이어야 맞겠지요! 청바지를 입었겠습니까?’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날 우리가 먹은 술은 공짜였다. 겨울날 한복 입은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들려준 대가로
생판 처음 보는 인생선배가 술을 사겠다는 제의에(김두한 시절은 아니었으나 1970년대 말 종로통 분위기는 이런 낭만도 있었다.) 테이블을 붙여 왁자지껄한 대화의 장이 마련되었지만 나하고는 좀처럼 공통분모를 찾기가 어려웠다. 선배가 생각했던 에로틱한 분위기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는 눈 내리는 소리였지 실제로 옷 벗는 소리가 아니었기에...
<설야>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면
서글픈 옛자췬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후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