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著, 북루덴스刊 , 우리는 이제 건너가야 합니다.
2022년 1월, 최진석교수가 안철수 대선 후보 선대위원장으로 영입되었다. 최진석교수가 이 책을 발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안철수후보도 최 교수를 영입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안 후보가 대선에서 지더라도 대한민국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담론을 던져 놓길 바랐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국민들이 최진석교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아래와 같은 인터뷰기사가 송출되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당 상임선대위원장이 안철수 대선 후보의 지지율 하락세에 대해 “참 신비스러운 일”이라며 “맹목적 지지를 하는 유권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2023.01.27일)
최진석교수가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어도 이 책은 읽어볼 만하다.
머리말: 이제는 건너가자
인간은 자기 시선높이 이상을 절대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시선의 높이는 그만큼 치명적입니다. 통일 같은 전략적인 문제를 감성과 믿음으로 얼버무린 전술적인 시선으로 덤비면 통일은 멀어집니다. 추격에서 선도국가로, 일등 추구에서 일류 추구하는 습관으로 높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한 생각의 결과로 살던 삶에서 스스로 생각하여 사는 삶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시선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을 하려고 덤비는 것은 세상사 이치에 대해 아는 바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지는 무섭습니다. 무지하면 염치도 모르고 스스로를 파괴합니다.
일류를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는 일류의 정치, 교육, 국방, 일류의 기업이 무엇인지 아직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일류의 삶으로 도약해야 하는데 정작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죠. 안타깝지만 해야 할 도약을 시도하지 않은 채 너무 오랜 시간을 헤매고 있습니다. 경제는 대세하락, 사회는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날 선 비난만 주고받는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기품, 존엄, 염치 같은 인간 기본기는 다 살아진 듯합니다. 이 위기를 벗어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보기에 저는 일류국가, 선도국가, 창의성 이란 말을 하는데 힘을 쏟습니다. 어떤 이는 제게 말합니다. ‘그건 철학이 아니잖아요?’
현실 정치를 담은 글을 쓰면 비난 댓글도 올라옵니다. ‘철학이나 하지, 정치적인 일에 꼽사리 끼느냐?’ 정치와 철학을 별개로 보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 칸트, 공자, 율곡, 다산은 귀에 익숙하지요? 플라톤은 아예 ‘국가론’에서 철인 정치를 주장하며 국가의 문제를 철학적 높이에서 다룹니다. 공자, 노자도 국가 통치를 중심에 둔 정치 철학자입니다. 칸트도 어떻게 민족을 국가로 조직해 낼 수 있을까 등 공화국의 기초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다산은 낡은 나라를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에 집중했죠.
기원전 8세기부터 2세기 정도를 機軸時代(기축시대)라 하며, 기축이란 인류문명의 기본이 생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철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죠. 탈레스, 소크라테스, 노자, 공자 등이 등장해 세계를 보는 시각이 형성됩니다. 철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문명의 주도권을 신에게서 빼앗아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역사의 책임자가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신을 믿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맹신의 시대에서는 신에 대한 복종만 필요했기에 용맹함이 중요했습니다. 이후 생각하는 능력으로 무장하여 역사의 책임자로 등장함에 따라 인간에게 힘이 되는 것은 주먹이 아니라 말이 되었습니다. 말을 잘 사용하고 설득력의 수준에 따라 지배적 위치를 정하는데 말 잘하는 사람을 웅변가라 하지만 사실은 정치가입니다. 이처럼 철학과 정치는 같은 시기에 등장합니다.
지적으로 높은 차원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문제해결을 논하면 철학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구체적 방식의 문제해결에 집중하면 정치가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지적 방식이라는 점에서 둘 다 똑같습니다. 정치의 구체성과 철학의 추상적 활동능력이 조화되어야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고 사회는 건강성과 진보성을 보장받습니다. 철학의 인도를 받지 못한 정치는 기능에 빠져 소위 정치공작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정치공작은 정치권력을 잡고, 지키는 데만 신경 쓰지 사회를 진보시키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는 행위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정치는 사라지고 정치공작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철학적으로 사회통합이 이상적이지만 권력유지에 사회분열이 유리하다면 분열을 택합니다. 정치가 정치공작 수준에 머무르면 지적사유보다 감정적 믿음에 빠진 것이라 포용, 통합, 진보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자기 시선높이 이상을 절대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시선 높이에 따라 일거수일투족이 결정되듯 국가도 똑같습니다. 국가의 모든 것은 권력자의 시선 높이에 따라 결정됩니다. 시선 높이가 치명적인 결정권자가 됩니다. 시선의 높이는 지적인 높이이지 감정이나 감각의 높이가 아닙니다. 지적 높이는 추상정도에 따라 결정되며 더 추상하면 더 높아집니다.
작은 일에 집착하여 일을 그르칠 때 ‘왜 전체를 보지 못하는가?’ ‘왜 넓게 보지 못하는가?’ 합니다. 전체를 못 보고 넓게 보지 못하는 이유는 넓지 않아서가 아니라 높지 않아서입니다. 우리는 이를 무지라고 합니다. 산 전체를 보려면 더 높은 산에 올라가 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시선의 높이를 끌어올린다면 넓게 보는 능력도 올라갑니다. 지금은 국제경쟁 속에서 이해하고 해결해야 이익이 커지는 세상으로 시선이 높지 않아 국내에 갇혀 있으면 국제 경쟁의 넓은 틀을 보지 못합니다. 국력이 더 강해지는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시선의 높이는 결국 실력입니다. 분열된 상태를 내려다보는 높은 시선을 갖지 못한다면 통합은 구두선일 뿐이며 실력이상의 것에 대한 모든 약속은 허망합니다.
통치력도 이제는 높이를 이해하고 높이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통치력으로 비효율의 늪에서 고생했으나 이제는 건너가야 합니다.
도산공원 안창호기념관에 가면 선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건전한 인격이 되어라’ ‘건전한 인격’은 우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언행이 일치하며 염치를 압니다. 진영의 믿음을 대행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대답에만 빠지지 않고 질문합니다. ‘정신승리법’에 빠지지 않습니다. ‘심리적 기대’를 ‘객관적 사실’로 착각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결국 높아집니다.
안창호선생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하지 않는가?’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온 민족입니까? 어떻게 번영시킨 나라입니까? 여기까지만 살다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건너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