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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가에 앉는 마음 Jan 28. 2024

840.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2)

최진석著, 북루덴스刊

시선의 높이가 중요한 이유, 칩

 감자칩과 반도체칩 중 어느 것을 더 높게 평가해야 합니까? ‘반도체칩에는 반도체칩의 역할이 있고 감자칩에도 고유한 역할이 있으니 높낮이를 따질 수 없습니다.’ 매우 세련된 대답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생산할 때 쓰이는 지식과 이론의 높낮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식과 이론은 인간이 세계를 통제하려고 만든 고효율장치다. 높은 이론은 높은 곳에서 통제하고 낮은 이론은 낮은 곳에서 통제한다.


시선의 높이

 비슷한 질문이다. ‘높은 문명과 낮은 문명의 차이가 있습니까? 혹은 앞선 문명과 뒤따라가는 문명사이의 차이가 있습니까?’ 칩에 관한 대답보다 빠르고 단호하다. ‘문명 사이에는 높거나 낮거나 앞서거나 뒤서거니의 차이가 없습니다. 각자의 문명은 각기 다른 전통과 가치가 있으니 모두 동등합니다.’

 꼭 그런가? 문명을 구성하는 것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것이 물건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가운데 한글 이외 가장 먼저 만들기 시작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제도는? 사상은? 물건, 제도, 철학은 문명의 총체이나 우리가 먼저 만든 것은 찾기 어렵다. 먼저 만들면 새로운 세계흐름을 만들고 주도권을 쥐게 된다. 흐름의 주도권을 잡으면 선진국이자 전략국가이나 그러지 못하면 후진국이며 뒤따라간다.

 높낮이로 봤을 때 보이지 않는 세계가 세계를 통제한다. 지식과 이론은 보이지 않는 관념의 세계다. 보고 만지는 감각경험세계에서 쾌락을 만드는 일이 예능이고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높이에서 쾌락을 다루는 일이 예술이다. 무엇을 즐기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시선이 어느 높이에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삶의 질과 양을 결정하는데 온 나라가 예능에 빠져있다. 심지어 지식과 정치도 예능에 잡혀있다. 우리는 지금 예능의 높이에 있다.

 세계는 좌우만 따지면 높이를 갖지 못하고, 높낮이만 따지면 넓이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혁명, 진보, 개혁 등은 같은 높이에서 처지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고도를 높이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처지와 입장만 바꾸는 것은 개량일 뿐이다. 이제는 높낮이를 살펴야 할 때다.

     

우리는 왜 과거에 갇히는가

 우리 실력이 과거를 어루만지는 것 이상이 아니기에 과거에 갇힌다. 그런데 과거에 갇히면 망하고, 미래로 나아가면 흥한다. 과거에 갇힌 사람과 사회는 멈춰 서고, 미래를 여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거가 정리되지 않고 어떻게 미래가 열릴 수 있냐고 말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평생 과거만 정리하다가 보낼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미래를 열 생각도 없다.

 세계의 변화에 맞추려면 흐름에 따라 나아가야 하나 우리는 과거와 명분에 묶여 있다. 문명의 단계가 아직 종속적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일 수 있다. 우리 삶을 채우고 있는 물건과 제도는 다른 문화권의 것으로 우리는 지식수입국이다. 지식을 수입한다는 것은 세계에 반응하는 체계적 방식 자체를 수입한다는 말이 된다. 지식생산의 모습은 원리나 공식 등의 지적 체계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사태에 대한 개념화 예를 들면 워라밸, 4차 산업혁명, Z세대, X세대 등도 지적 생산력의 표현이다. 물건의 창의적 제작과정도 다르지 않고, 제도를 최초로 출현시키는 일도 유사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새로운 것들은 불편함과 문제들을 해결한 결과다. 새로운 것을 생산해서 앞서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불편함과 문제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해결하려 덤벼야 한다. 문제를 발견할 때 인간이 하는 최소한의 지적 활동이 질문이다. 불편함이나 문제를 해결한 결과를 숙지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의 지적 활동을 대부분 대답으로 채운다.


대답에 익숙한 사람들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습득하여 누군가 요구할 때 뱉어내는 일이며, 가장 중시되는 것은 ‘원래 모습’을 누가 빨리, 더 많이 뱉어내는가이다. 가장 높은 단계에서 제도적으로 운용되는 것이 考試(고시)다. 대답의 최상위전문가들을 선발하는 제도다. 여기서 급소는 ‘원래 모습’이다. ‘원래 모습’은 시제로 따지면 과거다. 그러다 보니 미래보다는 과거에 살게 된다.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이 채우는 사회의 논쟁들이 과거논쟁으로 빠지는 이유다.

 과거를 한 점 오류 없이 철저히 따져야 진실하게 산다는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었기에 입으로는 미래를 말해도 몸은 과거에 붙어있다. ‘원래 모습’이 기준이므로 기준에 맞으면 善이라 하고 맞지 않으면 惡이라 한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로 채워진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은 선악논쟁이다.

 우리가 도덕과 명분에 갇힌 이유도 우리 영혼을 이런 식으로 훈련해서다. 또 ‘원래 모습’은 기준이므로 기준에 맞으면 참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이다. 당연히 논쟁은 옳고 그름을 제일 중요한 위치에 놓고 따지는 진위논쟁으로 흐른다. 그런데 이 세계에 출현하는 새로운 것, 위대한 것, 제도나 사상가운데 진위논쟁을 거치거나 선악논쟁을 거쳐 나온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진위논쟁은 과거를 따지고 지키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미래를 여는 일에는 과거를 지킬 때만큼 효과적이지 않다.

 미래를 여는 지적활동은 질문이다. 질문은 내 안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 세계 어느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으며 자기에게만 있는 매우 비밀스럽고 사적인 것이다. 그래서 질문하는 인간,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동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만 있는 것을 근거로 활동하기 때문에 ‘독립적 주체’라는 호칭을 얻는다. 세계적 선도자 역할은 이런 독립적 주체들이 독점한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밟고 서서 아직 드러나지 있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것, 아직 해석되지 않은 것을 알거나 가지려고 도모하는 일이기에 개방적이고 확장적이며 미래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발전은 현재의 다음단계를 궁금해하고 꿈꾸다가 거기에 몰입하면서 이루어진다. 대한민국은 세계유일의 기적적 발전을 이룬 나라로 긴 시간 동안 다음을 향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발동하고 그것을 구현했다고 봐야 한다. 해방시점에서 건국과 정부수립이라는 다음을 꿈꿨고 그것을 완수했다. 그다음의 미래인 산업화를 꿈꾸고 이뤘고 민주화라는 꿈도 완수했다. 우리는 다음을 완수해 가며 착실히 미래를 연 것이다.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 발전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민주화를 과거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세력이 새 시대를 향해 스스로 각성하거나 새로운 어젠다로 무장한 세력이 등장하여 민주화세력을 과거로 만들어야 하는데 두 가지 모두 요원해 보인다. 


민주화는 과거시제 

 지금 우리에게 있는 혼란과 답답함은 민주화라는 현재에 멈춰 있으면서 다름의 새 시대를 맞이하지 못하는 사실에 기인한다. 발전하는 나라는 과거가 순조롭게 도태되는데 민주화세대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그 세계관이 여전히 닫혀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공부하지 않았고 1980년대 초반 논리에서 진화하지 않았다. 

 우리가 개척해 냈던 미래는 이미 다른 나라들이 먼저 열어본 것이다. 따라서 이룬 것도 훌륭하지만 민주화 다음의 미래는 우리 힘으로 열어야 한다. 민주화 다음의 선진화는 창의적 활동이 이끄는 단계다. 창의적 활동은 독립적 주체만 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인격의 한 형상으로 질문하는 능력이 필수다. 


어느 진영도 미래를 말하는 능력이 없다.

 어느 진영에서 ‘이것이 나라냐?’라고 하면서 자칭 혁명을 했지만 바뀐 것이 없기에 혁명은 분명 아니다. 혁명이 아닌 것을 혁명이라 자칭하며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밀려났던 세력은 ‘이것은 나라냐?’하며 반격한다. 대한민국의 슬픔은 어느 진영도 미래를 말하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나라냐?’ ‘이것은 나라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과거를 지키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대답하는 훈련만 하면 진위를 따지는 명분이나 선악을 따지는 도덕 감성에 갇히는데 이는 영혼을 과거에 맡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 특성이다. 그러면서 사실을 자세히 보는 능력을 기르지 못한다. 보이는 그대로 세계를 보지 못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 과거에 갇히면 도덕과 명분이 앞서게 되어 사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큰 부작용이다. 효율성이 저하되는데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문제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문제해결하려고 세금 풀어 망한 나라가 많았음에도 그 길을 따라간다. 우리만은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의식을 조작하는 확신범이  된다. 치욕과 무시와 굴종을 당해도 진실을 위해 감당하는 고난으로 간주한다.

 사실과 동떨어진 말을 하고도 알아채려 하지 않고 비판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갖춘 실력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비극이다. 나라나 기업이 망할 줄 모르다가 졸지에 망한 경우는 거의 없다. 망해가는 줄 알고, 심지어는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 망해간다. 다만 어찌할 수 없었을 뿐이다. 정약용은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할 곳이다.’ 하지만 70여 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조선의 실력은 경고를 듣고 개선에 나설 정도가 못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도 사실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보지 않고 듣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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