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著, 북루덴스刊
부끄러움을 아는 것
일밖에 모르고 살던 사람이 어느 날 낯선 질문에 빠지기 시작한다. 나는 왜 사는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누구나 인정하는 참된 가치는 존재하는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 혹은 본질적인 질문들에 빠지면 대개는 내면에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생활도 많이 흐트러질 수 있고 기존의 것들이 다 뒤틀린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본 적도 없는 곳으로 이끌리고 흔들린다. 보통은 40대, 50대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앞만 보며 달려가는 삶을 살다 갑자기 이런 삶에 빠지는가? 어느 정도 성취도 얻지만 앞만 보며 달려온 데서 오는 피로감을 느끼며 스스로 지치거나 고갈되어 간다는 위기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잠시 멈춰 서서 본직적인 질문들로 삶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은 버겁기도 하지만 약간은 고상해 보이기도 하면서 위로를 주기도 한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의 이유
그런데 이런 질문들 앞에서 스스로 지치거나 고갈되어 간다는 느낌에 빠진 채, 자신이 좀 약해진 것이 아닌가 걱정하면서 의기소침해지기도 하며 위로나 휴식이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쳤다는 그 기분은 한걸음도 더 나갈 수 없을 정도의 장벽이나 절벽 앞에 선 것과 같은 부정적 심리상태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오히려 기능적이고 양적으로 살던 삶이 정점을 찍거나 한계에 도달한 후, 고도를 높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실한 필요가 생겼기 때문에 질적 향상을 위해 대문 앞에 선 상태일 것이다. 기능적이고 양적인 삶의 고도가 자신의 크기만큼 높아지면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환경에 처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지금까지의 삶에 직접적으로 등장한 적이 없는 한 단계 더 높은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왜 사는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지쳐서 휴식이나 위로가 필요한 것이 다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휴식 다음의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라는 전진의 명령 앞에 서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약해져서가 아니라 혁신의 요구 앞에 선 상황이다. 사실 본질이나 근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들은 기능적인 것들보다 높다. 왜 사는가? 삶의 참된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는 것은 그런 가치나 본질이 작동하는 높이를 향해 내몰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낯선 질문들은 질문자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음을 자신과 세상에 알리는 신호다.
높은 수준의 삶
윤리적인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더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요즘의 상식이다. 윤리는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행위 다음의 원리적인 높이에 있다. 하나하나의 행위는 기능이지만 윤리는 본질적인 높이다. 윤리적인 기업은 수준이 높고 그렇지 않은 기업은 수준이 낮다. 윤리를 추구하면 본질적 가치를 중요하게 본다는 뜻이고 그렇지 않다면 본질보다는 기능에 갇혀있다고 볼 수 있다. 시선이 높은 기업은 지속적인 큰 성장이 보장되고 시선이 낮은 기업에는 보장되지 않는다. 본질이란 이런 역할을 한다. 본질은 텅 빈 존재적 위상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하면서 높이와 두께를 가지게 되고,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크기와 생명을 더 효과적으로 보장해 주는 무기가 된다.
‘Draft Day’라는 영화는 미식축구 구단주 써니가 선수 선발하는 과정에 얽힌 이야기다. 켈리헨이란 선수는 대학선수이면서 올해의 최고선수상과 성적 우등상까지 받은 최고의 선수다. 두 개의 일화가 중요하다. 켈리헨은 대학선수 때 생일파티에 백 명 넘는 손님을 초대했지만 같은 팀 선수는 한 명도 초대하지 않았다. 또 다른 일화는 어느 구단에서 자기 팀에 관심을 둘 만한 선수들에게 작전설명서를 보내며 마지막 장에 100달러 지폐를 붙여 놓았다. 나중에 읽었냐고 물어보니 모두 읽었다고 하면서도 절반은 100달러 지폐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읽지 않았으면서 읽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대부분은 읽지 않았다고 고백한 반면 켈리헨은 ‘아! 이제 생각났네요.’라고 하며 거짓말을 한건 더 했다.
브라이언 드류라는 선수만 ‘우승을 안겨드릴 때까지 아껴두세요.’라는 편지와 함께 100달러 지폐를 돌려보냈다. 브라이언 드류는 언젠가 경기 중에 터치다운을 성공시킨 후, 그 공을 관중석의 여성에게 준다. 그것은 규정위반으로 브라이언 드류는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그 공을 받은 여성은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사는 브라이언의 누이로 얼마 후 사망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징계도 감수하게 한 것으로 해석된다.
써니는 켈리헨이 탐났지만 가장 본질적인 인성문제에서 안심이 되지 않아 마지막 확인을 하게 된다. ‘당신 생일에 동료가 왔는지 진실만 말해 달라.’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써니에게 켈리헨은 끝까지 바른 길 위에 서지 못한다. ‘부끄럽지만 그날 밤 일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대신 생각나지 않는다며 자신을 위장한다. 켈리헨이 ‘부끄럽지만...’이라고 했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염치가 없는 것이다. 기능적인 것을 추구하는 욕망이 본질적 태도보다 컸다. 써니는 1차 지명권으로 브라이언 드류를 지명한다.
운동선수에게는 운동능력이 가장 중요하게 보이지만 수준 높은 단계에서는 운동능력이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인격의 총화임을 안다. 인격적인 문제는 본질이고 눈에 보이는 운동능력은 기능이다. 이 영화에서는 우리에게 삶의 매 순간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더 잘하고 싶으면 기능보다는 본질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개 이런 수준의 선택을 하면서 앞서 나간다. 목표보다는 목적을 선택한다든지, 선적보다 인성, 시청률보다 작품성, 진학률보다 인간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 본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왜 미식축구선수에게서 거짓말여부, 언행일치 여부, 좋은 동료관계 여부들을 매우 중요하게 봐야 하는지는 더 수준 높은 실력이란 기능적인 운동능력보다도 결국 그런 점들로부터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수준 높은 삶이다. 선진적이고 창의적이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격들은 이렇게 산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지켜지지 않더라도 운동만 잘하면 된다는 수준에서의 선택은 삶을 기능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진정한 승리의 길을 보장하지 않는 대신에 종속적인 삶으로 인도할 뿐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
이런 의미에서 공자도 君子不器(군자불기: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기능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를 이야기했다. 본질과 기능 사이에서 본질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를 발휘해야만 제자리에서 뱅뱅 돌거나 좌우의 수평적 이동에 머물지 않고 차원을 높여가며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내면을 갖는 것이 가장 기본이고, 이 기본이 본질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자공이 학문을 닦고 인격을 도야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태도를 묻자 공자는 行己有恥(행기유치: 부끄러움을 아는 것)라고 답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내면을 가졌는지 여부가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룰지 결정한다고 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염치라 한다. 수치심을 모르면 정의로운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불의가 주는 잠깐의 이익을 거부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없다. 수치심을 모르면 자식 앞에서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자식 망치는 줄 모르는 것은 부정한 일을 통해 얻을 작은 이익을 본질적 가치보다 큰 것으로 여기는 무지와도 관련된다. 지적능력이 전인적으로 배양되기 전에는 학식이 높아도 수치심을 알기 어렵다.
기능적인 잠깐의 이익을 거부하고 본질을 선택하는 태도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는 수치심, 즉 부끄러움을 알아야만 발휘된다. 그래서 중용에는 ‘수치심을 알아야 용기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기록했다. 수치심은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 중의 하나이며 정의를 실현하는 기둥이다. 사회에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는 자기반성능력이 사라지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려 파멸을 면치 못한다. 파렴치한 사회라면 거기서 무슨 일이 가능하겠는가?
개혁을 완수하고 싶은가? 혁명을 이루고 싶은가?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가? 자녀를 잘 키우고 싶은가? 인정받고 싶은가? 좋은 운동선수? 좋은 가수? 종합적으로 한 층 더 오르고 싶은가? 기능에 빠지지 않고 더 본질적인 것을 선택하면 된다. 본질적인 것은 염치를 아는 것이다. 최소한 부끄러워할 줄만 알아도 더 높게 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