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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울 것이 많은 세상

막내딸에게 문자 날리기 기술을 한수 배우게 될 날

by 물가에 앉는 마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윤 선배는 장기를 무척 잘 두었습니다. 제가 신입사원 때 ‘임 형, 五卒(오졸) 떼어줄 테니 저녁내기 장기 한판 둘래?’ (윤선배가 ‘형’을 붙일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본인에게 승산이 충분한 내기를 하자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길만 아는 초보라고 해도 五卒을 떼어주면 수비가 안 되는데 설마 지겠냐 하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五卒 떼어주면 웬만큼 바보가 아니면 무조건 이기는 거야, 오늘은 내가 밥 살게 한판두자.’ 바보도 이긴다는 윤선배의 속을 뒤집는 소리에 또다시 꼬임에 빠집니다.

어리석게 꼬임에 빠진 저는 그날도 바보보다 못한 멍청이가 되었고 저녁을 삽니다. 그렇게 장기를 두면서 윤선배에게 한수 배우는 것은 장기 묘수가 아니고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법과 상대방 속을 긁는 법이었습니다. 故人(고인)을 욕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윤 선배 같은 사교의 달인과 고수에게 밥 한 끼 사는 대신 사람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교기술을 배우는 것이죠.


후배에게 배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금은 프로낚시인이 흔해졌지만 십여 년 전 우연히 알게 된 젊은 친구 명함을 받아보니 낚시프로 아무개였습니다. 주말낚시꾼이었지만 釣歷(조력)이 30년 정도로 붕어가 있다면 잡는 것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을 때라 프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겠다는 속셈으로 둘이 出釣(출조)를 약속하고 강화도로 향했습니다.

소풍 가는 날 비 온다고 태풍 수준의 바람이 불어 낚시하기 불가능한 수준이었으나 둘이 낚싯대 펴고 낚시를 합니다. 한 시간이 흐르고 두 시간이 흘러도 입질이 없었습니다. 그가 연신 채비를 바꾸고 난 후 한수 걸어냅니다. 결과는 2대 1로 숫자상으로는 근소한 차이로 진 것 같으나 바람의 세기와 물결의 움직임을 읽어내어 기상조건에 맞게 채비를 바꾸는 능력이 있었으니 저의 완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입을 열지 않았지만 저는 헛챔질 할 때 우연히 잡은 붕어이니 실제로도 2대 0 완패였습니다. 釣歷 30년이라지만 30을 갓 넘긴 프로와의 실력은 하늘과 땅차이이며 젊은 고수에게 또 한수 배우는 기회였습니다.


발전소 정비업무뿐 아니라 행정업무는 선배들이 하던 일을 답습, 모방하여 배우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새로운 상황이 발생되면 공부하게 되고 공부한 만큼 일을 배우게 됩니다. 산업재해기록이 정리된 88년 이후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인원은 29명이며, 추락이나 협착 등 사망과 사고와의 인과관계가 뚜렷한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생된 직원 자살건에서 또다시 한수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자살은 보험도 적용받지 못하며 더더군다나 산업재해하고는 무관하다고 알고 있었으나 예외적 자살의 경우에는 산재에 해당된다는 것을 이번일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산재법상 ‘업무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장해가 발생되었고 이로 인해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 자살을 하였다는 의학적 근거가 명확할 때는 산재로 인정한다.’라는 단서조항이 있습니다. 유족 측이 제기한 소송에서 산재로 인정받은 몇몇 사례도 있었으며 가까운 일본에서도 같은 판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창립 이후 첫 번째 사례로 하수들에게 한수 배워주며 떠나가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중학교 다니는 막내딸이 소위 ‘엄지족’이라 할 만큼 문자 날리기 고수입니다. 아파트 현관문 디지털 도어록을 여는데도 달인 경지입니다. 도어록을 열 때는 구렁이 담 넘어가는 것보다 느리고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낼 때는 구렁이보다도 느린 달팽이 기어가는듯한 느린 손기술을 갖고 있는 제가 막내딸에게 문자 날리기 기술을 한수 배우게 될 날이 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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