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3. 論語에서 길을 찾다.(1)

論語에서 길을 찾다.(1) (권영민, 임영숙共著, 북셀프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703. 論語에서 길을 찾다.(1) (권영민, 임영숙共著, 북셀프刊)


110page, 서문과 간지를 빼면 100page이니 아마 논어를 이야기한 책 중에서 가장 얇은 책이 아닐까 한다. 저자인 권영민씨는 ‘삶이 인문학이다.’라는 생각으로 ‘삶의 인문학’, ‘실천하는 인문학’을 추구하고 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책을 들었다.


서문: 삶의 인문학, 실천하는 인문학

요즘 인문학이 대세라고 하지만 정작 인문학의 문 앞에서 서성대기만 할 뿐, 그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인문학을 고상한 학문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학문으로, 때로는 전문가가 하는 학문 따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은 직접 먹고 사는 문제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성공과 행복에 직결되어 있는 게 인문학입니다.

동양에서 인문학은 우리의 생각은 물론 가치관, 삶의 형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문학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대표적 고전인 논어를 한마디로 줄이면 ‘仁學’이라 할 수 있습니다. 仁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지만 人이라는 해석도 타당하기에 ‘人學’, ‘人間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 사람다움과 관계에 대한 학문이 인문학이니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문학을 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1. 學: 배움과 실천

‘배우고 때에 맞게 그것을 익힌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제까지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로 해석했으나 최근에는 ‘배우고 제 때에 익히는’과 ‘배우고 제 때에 실천하니’로 해석합니다. 배움 자체에 즐거움이 있겠지만 배움을 삶에 실천하는 지혜로 작용할 때 배움의 진가가 나타납니다.

삶은 살며, 사랑하며 그리고 배우면서 그 삶의 하모니를 만들어 냅니다. 아름다운 ‘삶’의 의미는 ‘사랑’할 때이며, ‘사랑’은 삶의 목적이 되고, 삶의 목적을 계속해서 일깨워 주는 것은 ‘배움’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 현대인의 배움은 생존의 수단과 경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1등을 하기 위한 경쟁,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진학경쟁, 취업경쟁의 도구로서 배움이 존재합니다. 이런 배움을 ‘작은 배움(小學)’이라 할 수 있는데 작은 배움은 경쟁사회에서 극소수만이 승리를 맛볼 뿐입니다. 참됨 배움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다움’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는 ‘작은 배움(小學)’에서 ‘큰 배움(大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시키지 마라

자공이 여쭈었다. 한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그것은 恕(서: 용서할 서)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인 중궁이 仁에 대해 질문하자 공자는 ‘문밖에 나가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큰 손님 만나듯이 하라! 아랫사람을 부릴 때는 마치 큰 제사 받들 듯이 해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그러면 나라에서든 집안에서든 어느 누구도 그 지도자를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는 자

공자는 배움을 세 가지로 보고 있는데, 첫 번째는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천부적인 앎에 도달한 ‘生而知之(생이지지)’의 단계, 두 번째는 배워서 앎에 도달하는 ‘學而知之(학이지지)’의 단계, 세 번째는 많은 곤란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배우는 ‘困而知之(곤이지지)’의 세단계입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나는 나면서부터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 노력하는 사람’으로 후천적 노력으로 이뤄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사람의 천재성은 ‘머리’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후천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자신만의 천재성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2. 禮: 삶의 조화

이기주의를 극복하라: 자기를 이겨내고 禮(예)로 돌아가는 것이다.

안연이 사람다움(仁:인)에 묻자 공자께서 ‘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 禮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하셨다.

자신의 욕심을 제압하고(克己), 늘 ‘양심’에 맞게 살아가라(復禮), 이것이 공자의 가르침 전부입니다. 예절이란 양심 중 辭讓之心(사양지심: 남과 조화를 이루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발현입니다. 그러니 욕심을 극복하고 양심에 맞게 사는 것이 仁, 곧 ‘사람다움’이라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할 때 내 욕심을 채우지 말고 양심의 명령에 따라야합니다. 군자는 손해 볼 줄 아는 사람이고, 소인은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삶에서 화합을 이뤄라.

유자가 말했다. ‘예의 기능은 화합이 귀중한 것이다. 옛 왕들의 도는 이것이 아름답다고 여겨서, 작고 큰일에서 모두 이치를 따랐다. 그렇게 해도 세상에서 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화합을 이루는 것이 좋은 줄 알고 화합을 이루되 예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자의 화합이란 도저히 내 마음과 통할 수 없는 존재의 마음과 같이 하는 것이다. 김성근 감독은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에서 리더의 조건을 말 합니다. ‘끝까지 선수를 포기하지 않고 살리는 것, 그게 리더다. 알아보지 못하는 리더만 있을 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리더는 그 사람의 쓸모를 최대한 살려주는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삶의 균형을 맞춰라

예의근본을 여쭙자 공자가 말씀하셨다. ‘대단한 질문이다. 예는 사치스럽기보다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상례는 형식을 잘 갖추기보다는 오히려 슬퍼하는 것이 낫다.’

논어에는 근본적인 것을 물어보는 질문이 자주 등장한다. 예의 근본에 대한 질문에 ‘禮의 근본은 文이 아니라 質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허례허식은 내면적 가치인 질보다 형식에 치우친 상태를 말합니다. 형식으로서의 文과 본질적인 質의 균형을 이루되 본질의 質을 더 중시해야 합니다. 본질인 仁이 밖으로 나올 때 비로소 진정한 禮가 됩니다.


자신의 이름값을 하라

자로가‘선생님을 모시고 정치를 한다면 장차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묻자 공자는 ‘반드시 명분(正名)을 바로잡겠다.’하셨다.

正名의 한자 뜻은 ‘대의명분(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와 본분)을 바로잡아 실질을 바르게 함’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의자’, 'PC'가 고유기능을 상실하면 더 이상 ‘의자’, 'PC'가 아니듯 부모의 기대와 희망이 담긴 이름값을 해야 합니다.


부모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아이들이 부모에게 복수하고, 이 시대의 리더라는 명문대 교수가 성추행을 하는 등 정치인, 종교인, 부모, 학생이 제 이름값을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눈앞의 ‘성공’만을 좇아 매달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제는 우리 모두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명분’이 아닌 것을 지나치게 ‘명분’삼고 있지는 않나 되돌아보아야겠습니다. ‘본래의 나’를 감추고 있는 가면과 체면문화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명분’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바로 세우지 않고 학벌, 성공만을 좇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부모는 자녀를 망하게 하는 겁니다.

지금 이 사회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왜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할 것인가? 무작정 남이 하니까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고 우리 가정에서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가치 있는 일인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質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마음의 균형을 잃을 때, 文과 質이 충돌할 때 質을 추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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