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1. 나 홀로 읽는 도덕경(2) (최진석著, 시공사刊)
노자의 無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철학적 사유의 맥락에서 제기한 사람이 노자인데, 무라는 개념으로 동양문명은 높은 수준의 사유에 이룰 수 있었습니다. 서양문명의 ‘0’과 같지요 0이 들어오며 자릿수가 생기고 아무리 큰 수도 계산할 수 있게 되었죠. 무는 기본적으로 없는 상태이거나 안 보이는 상태예요. 물론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고요. 노자는 무개념을 통해 안 보이는 세계를 삶 속으로 끌고 들어온 겁니다, 0이 등장하며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세계가 연결되지요.
인간은 ‘없는 것’ ‘안 보이는 것’을 다룰 줄 알아야 해요. ‘새로운’이나 ‘창의’나 ‘창조’ 모두, ‘아직 없는 것’이나 ‘안 보이는 것’이 현실화 된것이죠.
눈이 아니라 배를 위하는 게 무엇입니까?
노자에게 중요한 것은 自治(자치), 子正(자정)으로, 스스로 바르게 되는 것, 스스로 다스려지는 삶과 세상을 꿈꿨습니다. 노자는 이념이 아니라 몸을 중시했습니다. 몸은 가치나 이념의 접근을 거부하는 곳으로 가치나 이념 이전의 것입니다. 이념은 집단적이거나 보편적으로 내가 어떤 이념을 갖게 되면 ‘나’는 온전한 ‘나’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한명의 ‘나’로 존재하게 됩니다.
배나 눈은 모두 나에게 있지만 눈은 항상 밖을 향해 있어요. 모든 구분은 눈을 통해 이루어지고 어떤 것을 본다는 것은 다른 것을 안 본다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를 보는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과 구분합니다. 노자가 이념이나 기준을 부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폭력으로 전이되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이념이나 가치의 세례를 받기 이전의 상태를 배, 이후의 상태를 눈으로 표현한 겁니다.
노자는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는 자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근본에 서있는 사람이에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정치한다는 사람보다 나 자신을 한 인간으로 위대하게 완성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통치를 더 잘한다는 뜻입니다. 속한 정당이나 나라를 위해 산다는 사람은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뇌물을 받았다고 하며 부패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완성과 존엄을 위하는 사람은 뇌물 받거나 부패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천하를 위하는 사람은 부패하지만, 자신을 위하는 사람은 부패하지 않습니다. 이념에 빠진 사람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딱딱한 이념을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고 독재를 하게 되나 자신에 집중하는 사람은 이념에 빠지기보다 자신이 발견한 문제를 숙고합니다. 이념 덩어리인 천하에 빠진 사람은 대답만을 하기 쉽지만 자신에 집중하는 자는 질문하게 됩니다. 대답은 세상을 멈추게 하고, 질문은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공자는 계속해서 ‘너’를 학습시키고 단련시켜 바람직한 ‘우리’가운데 한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노자는 스스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자율적 인간으로 성장해야 건강한 우리가 만들어 진다고 봅니다. (註: 흔히, 孔孟思想의 대척점에 老莊思想이 있다고 합니다. 읽다보면 그것이 그것 같고 모두가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만 접근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제 방점은 ‘성숙한 인간’에 찍혀있기에 편하게 읽고 있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래에 조금 더 자세한 구분을 하겠습니다만 저자는 노자 전문가임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노자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내가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중시했고, 공자는 보편자적 이념으로 무장한 ‘우리’를 향해 나아가는 나를 중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자 노자 모두 공동체를 중시하지만 공자는 ‘우리’가 주도권을 갖고 거기에 ‘나’를 편입시키는 방식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노자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나’들의 연합으로 형성되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視(시)와 見(견), 聽(청) 聞(문)은 어떻게 다릅니까?
視는 목적을 갖고 신경 써서 보는 것이고, 見은 그냥 대상이 다가오는 대로 보는 겁니다. 聽은 특정 목적을 갖고 듣는 것이고, 聞은 들리니까 듣는 겁니다. 특정 목적을 갖고 보고 듣는 것이 視聽이고 여행을 가서 보고 듣는 것이 見聞입니다. 진실에 접근하려면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들어야 합니다. 見聞은 넓고 사실대로 보고 들을 수 있으나 봐야하는 대로 보면 주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보이는 대로 보는 사람이 봐야하는 대로 보는 사람을 항상 이길 수 있습니다. 통찰의 힘은 보이는 대로 볼 때 나옵니다.
明(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노자는 지보다 명을 더 강조했는데 知(지)는 지식에 가깝고 明(명)은 통찰력에 가깝습니다. 知는 알고 구분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明이라는 글자는 日과 月이 함께 들어 있는 형상입니다. 해와 달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해가 뜨고지는 운동은 달이 뜨고지는 운동과 반대로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해가지고 달이 뜨는 것은 각각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하나의 사건입니다. 사랑도 이별도 따로 분리되어 각각 존재하는 일이 아니라 한 쌍의 사건입니다. 노자는 대립면이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明이라 했습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인식이 知라면 둘 사이의 관계성과 변화를 동시에 인식하는 능력이 明입니다. 대립면을 동시에 파악하는 능력이 明인데 노자는 이 明의 태도를 가져야 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진정한 앎을 어떻게 찾아가야 합니까?
學, 배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방한다는 겁니다. 이미 있는 것을 흡수하고 거기에 자기를 맞추는 것으로 이런 방식으로는 언제나 모방하고 따라야 할 대상을 추구해야 하니 자신이 지신으로 존재하기 힘들어요. 항상 외부의 모델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면 근심과 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배움의 궁극적인 목적이 뭘까요? 자기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를 알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이 진정한 배움의 길이죠. 모방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의 삶을 정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모범으로 정해놓고 그것을 추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學의 방식을 취하게 되면 자기 삶에 자기가 없고, 다른 삶이 자기 삶으로 들어와서 내 삶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죠.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배웁니까? 잘 사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죠. 그럼 잘 사는 주체가 누구죠?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가 잘사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삶의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잘 산 사람의 삶을 따라 하기 위해 배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이것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공부할 때 무엇을 습득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왜 습득해야 하는지 자각하고 각성하는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에서 궁극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까지 제기돼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각성하고 자각하는 힘없이 정해진 내용을 숙지하는 학습만 계속해서는 강한 자기,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