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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가에 앉는 마음 Apr 21. 2024

856.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최진석著, 북루덴스刊)

어떻게 하면 한 단계 높은 사회로 발전할 수 있을까?

 ‘책 편식’, 아내가 최근 내게 하는 잔소리다. 최근, 광교에 있는 도서관을 아내와 같이 이용하면서 매번 비슷한 책을 꺼내드는 나를 보고 한 말이다. 최근 노자와 장자 관련된 책을 계속 읽고 있으며 또한 집어든 책이 최진석교수 책이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道家(도가) 전문가인 최진석교수의 저서는 2021년 발간된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를 제외하면 장자와 노자와 관련된 저술이었다. 이 책은 최 교수의 자전적 이야기에 노자와 장자이야기를 접목했다. 또한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의 후편과 같은 느낌도 있다. 어떻게 하면 한 단계 높은 사회로 발전할 수 있을까? 논리의 전개가 수준 높으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시선

 의식은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한다. 무엇을 만들거니 개척하려면, 그 들쑥날쑥하고 들락날락하는 것이 일정한 높이에서 초점을 맞춰 작동해야 한다. 높이와 초점을 맞춘 의식을 생각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왜 생각이 중요한가? 사람은 자신이 가진 생각의 높이 이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일정한 높이에서 작동할 때 그것을 또 시선이라 부른다. 어떤 기관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시선은 삶과 사회의 전체 수준을 결정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그래서 보통 일컫는 발전이나 진보라는 것도 사실은 시선의 상승이다. 여기 있던 이 시선이 한 단계 더 높이 저 시선으로 상승하는 것이 바로 발전이다. 그런데, 이 발전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지배하는 정해진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도전이 감행되어야 한다. 익숙함과의 결별이다.


 장자 ‘逍遙遊(소요유)’에 나오는 이야기다. 위나라 왕으로부터 커다란 박이 열리는 씨앗을 선물 받은 혜자는 뒤뜰에 심었고 씨앗에서는 엄청나게 커다란 박이 열렸다. 그런데 너무 커 물을 담자니 무거워서 들 수 없을 지경이고 쪼개 쓰자니 납작해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다. 위나라 왕이 말한 대로 크기는 켰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 깨버리고 말았다. 혜자의 말을 듣고 장자가 말했다. 

 ‘그렇게 큰 박이 열렸다면 어째서 그 속을 파내 큰 배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어 놀고 즐기려 하지 않고, 납작하여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고 걱정만 하셨소? 선생은 생각이 꼭 쑥대 대롱에 난 직은 구멍만큼이나 좁디좁군요.


 누구나 익숙한 생각에 쉽게 갇힌다. 혜자가 그랬던 것처럼 ‘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물을 담아 다니거나 쪼개서 바가지로 쓰는 일을 먼저 떠올리고, 그 생각에 ‘박’의 용처를 제한해 버린다. 그러면 ‘박’은 물을 담고 뜨는 기능에만 갇혀 그 이상의 다른 것을 하기 어렵다. 갇힌 생각은 이처럼 갇힌 세계를 만든다. 세계를 일정한 틀로 가두어버린다. 이미 있는 익숙한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는 부단히 새로운 환경을 접한다. 인간은 새로운 세계와 맞닥뜨렸을 때 적절한 대응 방안을 찾느냐, 찾지 못하느냐로 성패가 결정된다.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새로운 세계를 관리하려고 하는 일은 보통 누구나 하는 일이다. 새로운 영토를 확장하려는 역할은 새로운 세계와 맞닥뜨렸을 때 새 적응방법을 찾아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 이야기에서 예상 밖으로 ‘큰 박’은 이전에 대면한 적이 없던 새로 맞닥뜨린 세계다. 기존의 생각에 갇혀 있었던 혜자는 이 ‘큰 박’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응력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가 혜자에게는 ‘없는 세계’가 되었다. 박을 깨서 새로운 세계 자체를 부정해 버린 것이다.


 장자는 새로운 세계에 맞는 새 적응방법을 만들어냈다. 창의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까지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는 ‘박 배’가 탄생하였다. 바로 창조다. 이런 창조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장자가 ‘박’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일은 기존의 관념이 주는 무게감을 이겨낼 수 있는 단련된 자아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아가 이념과 관념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단련된 상태, 사실은 이것이 모든 창의적 활동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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