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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가에 앉는 마음 May 05. 2024

860. 권해의 “장자”(권해著, 새문사刊) 잡편

칠성미도(길 잃은 일곱 명의 현자), 무위자연을 추구하는 도가의 입장 차

 七聖迷途(칠성미도) 길 잃은 일곱 명의 현자

황제가 도를 얻은 대외(大隗는 大道의 뜻이다.)를 만나러 구자산으로 갔다.

방명이 수레를 몰고 창우가 동승했으며 장약과 습붕이 수레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곤혼과 골계가 수레 뒤에서 수행했다. 그런데 그만 양성의 너른 들판에서 황제와 일곱 명의 현자는 길을 잃고 말았다. 길을 물을 데도 없었으나 말 키우는 목동을 만나 길을 물었다.

;그대는 구자산을 알고 있나?‘

‘네’

‘그러면 대와가 계신 곳을 아는가?’

‘네’

황제가 말했다.

‘허, 기특한 아이일세, 구자산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외가 계신 곳까지 알고 있으니 그럼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도 한번 물어볼까?’

목동이 대답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일도 그저 이런 식으로 하면 되는 것이지 뭐 다른 일 있겠습니까? 저는 어려서 이 우주의 안에서 노닐며 지냈습니다만 눈이 흐릿하게 보이는 병에 걸렸습니다. 어떤 어르신이 가르쳐 주기를, 양성의 들판에 해가 뜨면 나가 놀고 해가 지면 들어가 쉬며 유유자적하게 노닐며 갈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제 병이 조금 나았기에 저는 다시 우주의 밖에 노닐며 지내려 합니다. 대저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도 이와 같이 할 뿐이니, 내게 무슨 일삼아할 게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황제가 공손하게 말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그대께서 맡은 일은 아니지만 부디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고 싶습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말을 기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말을 해치는 것을 없애줄 뿐입니다.’

황제는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채 큰 스승이라 부른 뒤 물러났다.


 지혜롭다고 하는 자는 이리저리 궁리하여 꾀를 부릴 일이 없으면 즐겁지 않고, 말하는 자는 변론에 논리가 서지 않으면 즐겁지 않으며, 분쟁을 따지는 자는 다툼이 생기는 일이 없으면 즐겁지 않으니 이들은 모두 외물에 사로잡힌 자이다.

 세상의 천거를 받은 자는 조정에서 날리고, 민심을 얻은 자는 벼슬을 얻고, 힘을 쓰는 자는 난리통세서 뽐내고, 용감한 자는 난리를 만나서 분발하며, 전공을 세우려는 자는 전쟁을  좋아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는 자는 명성에 머물고, 법망을 따지는 자는 법망을 넓히려 하고, 예악을 만드는 자는 거동을 공경스럽게 하며, 인의를 내세우는 자는 남과의 교제를 귀히 여긴다.

 농부는 밭 갈고 김맬 일이 없으면 모이지 않고, 상인은 장터에서 매매할 일이 없으면 모이지 않는다. 서민은 밤낮으로 할 일이 있으면 힘쓰고, 기술자는 기계가 있으면 열심히 일한다. 탐욕스러운 자는 재물을 쌓아놓지 않으면 근심하고, 뽐내기 좋아하는 자는 권세를 떨치지 못하면 슬퍼한다.


 권세와 재물을 좋아하는 자들은 세상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니, 때를 만나면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여 쓰지만 조용히 무위 할 줄을 모른다. 이들은 모두 한 해의 변화를 쫓아다니지만, 변화하는 속에는 物化(물화) 하지 않는 것도 있는데도, 이들은 몸과 마음을 계속 치달리면서 사물 속에 빠져서 평생 자신의 근본으로 돌아오지 못하니 슬프도다.


 황제를 위시해 도를 안다는 현자가 일곱 명이나 있는데도 길을 잃었다. 도를 안다는 이들이 길을 잃었다니 아이러니다. 이는 마치 공자가 길을 잃고 강을 건널 나루를 물었다는 ‘논어’의 고사를 연상시킨다. ‘사람이 가야 할 길’ 즉 道(도)를 가르치고 다닌다는 공자가 나루터로 가는 길을 묻는 것은 자가당착이 아니냐는 힐난이다. 인위로 세상을 다스리려 하는 유가와 인위를 배격하고 무위자연을 추구하는 도가의 입장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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