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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가에 앉는 마음 May 12. 2024

863. 권해의 “장자”(권해著, 새문사刊) 외편

귀천, 대소 같이 기본적인 개념도 잘못된 선입관과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권해는 조선 중기 남인출신 유학자로 27세 문과 급제 후 당쟁에 휘말리며 유배와 복권을 반복했다. 이 책은 논어의 주석서인 노론주해와 주역에 관한 저술인 희경변의 등과 함께 저술되었다. 

 아마도 권해는 울분에 찼던 시절을 장자의 호방한 세계 속에서 적잖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고, 오히려 재주를 갖고 있다가 화를 당하는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무용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장자의 역설을 보며 공감하기도 했었으리라.

 조선시대 선비들이 장자를 사랑하고 애독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일시적 시흥을 빌린 시문들 속에 편린을 볼 수 있을 뿐 전채적인 주석을 갖춰 쓴 문장은 보기 어렵다. 노장을 애독하더라도 노장사상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글을 쓰더라도 불살라버리지 않으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더구나 당파 간 대립이 극한 상황에서 주자학에 배치되는 언행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 외편 중에서 -

河海問答(하해문답): 강물과 바다의 문답

 하백(거대한 황하의 신)이 말했다. 

‘세상에 따지기 좋아하는 논변가들은 ’지극히 精微(정미) 로운 것은 형체가 없고 지극히 큰 것은 그 밖을 둘러쌀 수 없다 ‘고 하는데 이는 믿을만한 사실입니까?

 북해약(바다의 신)이 말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보려 하면 전체를 다 볼 수 없고, 큰 것이 작은 것을 보려 하면 잘 보이지 않는다. 작은 존재 중에서도 미세한 것을 精(정)이라 하고, 큰 존재 중에서도 성대한 것을 垺(부)라고 한다. 이렇게 다르게 구별함은 서로 형세가 다른 것이다. 정미롭다거나 거칠다는 것은 형체를 가진 존재에 대해 하는 말이다. 형체가 없는 것은 너무 작아 수를 나눠 볼 수 없고, 밖을 둘러쌀 수 없는 것은 너무 커 수로 다 셀 수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사물 중에서도 크고 거친 것이고, 관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물 중에서도 작고 정밀한 것이다. 언어로 논할 수도 없고 관념으로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것은 크다 작다는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이 세상의 옳고 그름이란 게 간단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크다 작다 판단할 수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듣기로 참된 도인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지극한 덕은 얻을 수가 없으며 대인은 자기 몸에 없다. 고 하니 이는 지극히 자기 분수를 지극하게 단속한경지이다.’

 하백이 말했다. 

‘사물에는 안과 밖이 있는데, 대체 어느 점에서 귀천이 갈라지고 대소가 나뉘는 것입니까?

 북해약이 말했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에는 귀천이 없으나, 사물 각각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은 귀하고 상대는 천하게 보인다. 세속의 관점에서 보면 귀천은 자기 혼자 판단할 수 없다 상대적 차이의 관점에서 보면 각자가 크다고 생각하는 점을 기준으로 하여 크다고 판단하면 만물은 크지 않은 게 없고, 각자가 작다고 생각하는 점을 기준으로 하여 작다고 판단하면 만물은 작지 않은 게 없다. 이런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결국천지가 쌀 한 톨과 같고 털끝이 동산만 함을 안다면 차이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알게 될 것이다.


 객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자기가 갖고 있는 바를 기준으로 있다고 판단하면 만물도 모두 갖고 있는 셈이 되고,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한 바를 기준으로 없다고 판단하면 만물도 모두 없는 셈이 된다. 동과 서는 서로 반대방향이지만 서로 가 없어선 안 된다는 점을 알면 객관의 본질이 정해진다. (서쪽은 동쪽 집에서 볼 때 서쪽이며, 동쪽은 서쪽 집에서 볼 때 동쪽이니 원래부터 동, 서가 정해져 있다고 할 수만은 없다.) 


 주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각자가 옳다고 여기는 바를 기준으로 하여 옳다고 판단하면 만물은 옳지 않은 게 없고, 각자가 그르다고 여기는 바를 기준으로 하여 그르다고 판단하면 만물은 그르지 않은 게 없다. 성군인 요임금이나 폭군인 걸임금이 자기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주관의 자의성을 알 수 있다.


 대들보는 성벽을 부술 수 있지만 작은 구멍을 막을 수 없는 것은 그릇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지만 쥐 잡는 데에는 살쾡이만도 못한 것은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한밤중에 벼룩을 잡고 털끝을 분별해 내지만 대낮에 나오면 눈을 부릅떠봐도 동산을 보지 못하는 것은 천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옳다는 것만을 본받고 그른 것을 없애거나 다스림만을 따르고 어지러움을 없애려 한다면 이는 아직 천지의 이치와 만물의 실정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하늘만을 본받고 땅을 없애며 음만을 따르고 양을 없애는 격이니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은 명맥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잘못된 생각을 떠들면서 버리지 않고 있다면 그는 바보 아니면 사기꾼일 것이다.


 귀천이나 대소와 같이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도 잘못된 선입관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하백의 생각은 유교사상을 비유한 것이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하백의 딸이다.)

 넓은 황하도 바닷물에 비하면 구우일모에 지나지 않는다. 북해약은 우리의 인식을 우주 전체로 다시 한번 확장시킨다. 관점과 지평을 넘나들며 털끝도 작다고 말할 수 없고 우주도 크다고 말할 수 없으며 크다 작다는 언어와 개념을 초월한 도에 관한 절대주의적 세계관을 펼치고 있다.


死龜留骨(사구유골): 거북이는 죽어서 껍데기를 남기지만

 장자가 복수에서 낚시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초나라 왕이 대부 두 명을 보내 만나보라 했다.

‘境內(경내) 일로 수고스럽게 해드리려 합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잡은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듣기에 초나라에 죽은 지 3천 년 된 신묘한 거북이 있다고 합니다. 왕이 수건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 종묘 안에 잘 모셔두었는데, 이 거북이는 죽어서 귀중히 모셔지는 껍데기로 남아있기를 원하겠습니까? 차라리 살아서 진흙 뻘에 꼬리를 끌고 다니겠습니까?’

두 대부가 말했다.

‘차라리 산 채로 진흙 뻘에 꼬리를 끌겠습니다.’

장자가 말했다.

‘가십시오. 나는 진흙 뻘에 꼬리를 끌며 살겠습니다.’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탐하지만 부귀영화를 얻으려면 자유로운 삶을 포기해야 하고 타고난 천성을 꽁꽁 얽어매두어야만 한다. 부귀영화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첨과 굴욕 그리고 희생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자신을 國師(국사)로 모시겠다는 달콤한 말을 거절하고 진흙뻘에 꼬리를 흔들며 초야에 살겠다고 선언한다.

 지금 우리 시대에 장관으로 초빙하겠다는 유혹에 장자처럼 불쾌해하거나 제갈량처럼 세 번이나 사양하는 예라도 행할 사람이 있을까? 청문회나 신문지상에 들려오는 지도층 인사들의 추문에 차마 아이들의 눈과 귀를 막아야 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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