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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가에 앉는 마음 May 30. 2024

871. 묘한 집착

번호 앞에 -기호를 붙였다. 흡사 기원전, 기원후 표식같이

 사용하지 않으면서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이 있다. 아버님께 물려받은 낚싯대, 붓과 벼루, 헌책 그리고 어머님께서 남겨주신 재봉틀은 사용하지 않지만 집 정리하면서도 버리지 못했다. 죽기 전 처분 가능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유품들은 선대와 후대를 이어주는 추억임과 동시에 가늘게나마 이어진 끈을 놓지 않으려는 집착이다. 

 막내는 중, 고등학생시절 교복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교복을 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졸업했으니 버리거나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봤지만 막내는 조금 별나다. 어릴 적 놀러 갈 때 챙겨야 하는 필수 템은 베개와 담요였다.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오래된 애착베개와 담요에 대한 집착은 막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나 교복은 아닌 듯했다.


 교복은 10년 넘게 옷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막내는 해외생활을 하며 일 년에 한두 번 들어와 친구 만나고, 먹으러, 보러 다니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바쁘게 산다. 올봄에 벚꽃 보러 들어와 한 달여 넘게 있으면서도 교복 없어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막내가 오기 전, 집을 넓게 쓰려고 가구, 피아노, 전자제품, 옷 등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빈도가 낮은 물건들을 버리거나 팔았다. 대부분 물건들은 돈을 주고 버렸으나 가장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막내의 교복 등 옷가지는 분리수거업체에서 수거해 가며 과일 값을 주고 갔다. 

 오래된 추억과 집착들은 폐기물트럭에 실려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어느 물건은 또다시 누군가와 추억을 만들기 시작했을 테고 일부는 재활용품 창고에서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허전하고 섭섭했으나 집이 넓어져서 좋고, 넓어진 거실에서 교복 팔아 구입한 과일을 먹으니 달고 맛나다.

 누군가 서양 사람이 그랬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물건도, 사람까지도 눈에서 멀어지면 잊혀지기 십상이라고 


 편지 보내기 시작하며 별 의미 없이 연번을 붙였다. 첫 편지를 보내며 1주에 한통씩 보내니 500번 정도 보내면 퇴직할 시기가 도래하겠다고 생각했으나 정년연장으로 600번대 편지를 보내고 퇴직했다. 

 다른 직장 취업 및 퇴직, 제3의 직업인 손녀 돌보미를 하고 있는 오늘도 연번이 붙은 편지를 보내고 있다. 1000번째 편지를 쓰고 그만두려 생각했으나 요즈음은 시간이 많이 남아 일주일에 3 통도 보내고 있다.


 편지정리를 위해 브런치에 올리기 시작하며 회사 대외비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빼고 다른 이야기를 넣다 보니 번호가 흩트러진 것 같다. 연번 850번 일 때 브런치에 저장된 내용은 842개로 8 건아 모자란 것을 알았다.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브런치를 열 때마다 눈에 거슬린다. 성격 탓이다.

 850개 이야기를 모두 검색해 몇 번이 누락되었는지 찾아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만한 노력과 정성을 들일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만두었다. 대신 2~30년 전에 사보에 연재했던 내용과 신문 잡지에 올렸던 내용으로 부족한 숫자를 맞추기로 했다. 정리하다 보면 8건이 아니라 10건이 넘을 수도 있겠다. 숫자가 부족한 것은 참지 못하나 남는 것은 그래도 봐줄 만하다.   

 16개의 지난이야기에 마이너스 표시를 했다. 8개가 모자란데 2배를 브런치에 올려놓았다. 다음에 연번을 매길 때 실수로 번호를 몇 개 건너뛰어도 문제없을듯하다. 맞아 들어가면 최상이지만 부족하면 눈에 거슬리는 정도가 심하다. 남았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모든 숫자가 맞아 들어가야 마음이 편하다.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공과 직업병인 듯하다. 1+1=2이어야 하는 공학을 전공했고, 원자력발전소 근무, 품질보증, 기술관리, 연구기획을 하다 보니 모든 숫자가 맞아야 했다. 퇴직 후에도 같은 증상이 지속된다면 병이지만 정신과 상담은 받아보지 않았다.  

 아무튼 브런치에 추가로 올린 내용들은 번호 앞에 -기호를 붙였다. 흡사 기원전, 기원후 표식 같아 생경하지만 모자라지 않아 마음은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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