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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가에 앉는 마음 Jun 06. 2024

874. 촌스러운 설 나들이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요즘 세대도 그런지 몰라도 젊었을 때 명절에 고궁을 찾거나 영화관람을 하면 촌스럽다고 했었다. 하지만 설 연휴 마지막 날, 촌스럽게도 경복궁을 찾았다. 고궁을 찾아도 촌스럽지 않은 연배도 되었고 거추장스러운 타인의 눈길에 신경 쓰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사실 덕수궁을 방문해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회고전을 구경하기로 했었다. 버스가 광화문 앞에서 정차했고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는 아내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側頭葉(측두엽)에 전해진 아내 목소리는 前頭葉(전두엽)에서 경복궁을 보고 싶어진 것으로 해석했다. 경복궁 가본 지 오래되어 내리기로 했다. 나쁜 머릿속에서는 코스 변경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아마도 海馬(해마)가 오래된 기억을 꺼내 ‘덕수궁→ 정동→ 청계천’에서 ‘경복궁→ 안국동→ 종로’로 코스를 변경했을 터이다.

 명절에 찾은 경복궁은 외국인들로 붐빈다. 광화문광장부터 한복 입은 외국인들로 인해 제대로 설명절임을 느끼는 것은 아이러니다. 광화문광장은 구조 변경을 거쳐 차량소통은 느려지고 인간 친화적이 되었다.


 근정전은 여전히 늠름하고 경회루는 언제 봐도 아름답다. 예전에는 향원정까지  관람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청와대로 통하는 길이 막혀있었으나 이제는 청와대 앞길로 나갈 수 있다. 청와대 앞길도 관람객으로 붐빈다. 청와대는 예약해야 관람 가능하여 다음으로 미뤘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여러 번 갔으니 이번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은 관람하기로 했다. 민속박물관은 상시관과 기획관으로 나뉜다. 춘하추동, 계절에 따른 생활상인 ‘한국인의 일 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활상인 ‘한국인의 일생’, 일상과 K컬처를 보여주는 ‘한국인의 오늘’은 상시관의 주제다.

 기획관에는 용의 해를 맞아 ‘용 날아오르다.’과 ‘가면의 日常(일상), 가면극의 理想(이상)’을 기획 전시하고 있었다. 가면전시 개요 글이 인상적이다. ‘나는 늘 가면을 쓴다. 학교에 가고, 회사에 가고, 사랑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나의 가면은 더욱 두꺼워진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면을 썼다. 얼굴을 가려서라도 갖고 싶었던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면의 역사는 욕망의 역사이고 행복을 위한 신화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페르소나(Persona: 가면을 쓴 인격)’라고 한다. 진정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투사된 모습은 내가 나를 보는 모습과 다른 거짓된 나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더 화려한 나를 보여주길 원한다. 현대인만 그런 줄 알았으나 고대인들도 똑같았다.


 전시물, 모형 등은 매우 사실적으로 만들어지고 고급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비디오기술을 접목한 동영상은 이해도 빠르고 수준 높게 제작되어 있다. 볼 것 많은 박물관이며 게다가 입장료는 무료다. 경복궁나들이할 때 고궁박물관과 민속박물관 관람을 빼놓으면 후회할듯하다.


 점심이 늦었지만 오늘은 서울 시내구경을 겸한 점심식사로 계획했다. 종로에서 동대문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 을지로를 통해 내려올 예정이다. 점심 메뉴는 종로 5가 ‘닭 한 마리’로 경복궁에서 음식점까지 약 3Km 된다. 멀지 않은 거리이며 구경할 겸 아내와 생수 한 병씩 구입하고 천천히 걷기로 했다.

 외국인으로 가득한 안국동 길은 고등학생, 대학생 때 자주 걸었던 길이지만 풍경은 많이 바꿨다. 이곳도 외국인과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안국동 길을 빠져나와 낙원상가앞길을 지나니 갑자기 2세대를 건너뛴 것처럼 풍경이 바뀌었다. 허리 구부정한 어르신들이 많아 나는 애들처럼 허리 꽃꽂이하고 걸었다.

 속칭 어르신들의 성지라는 탑골공원에 들어섰다. 어릴 적 파고다공원으로 불렸던 탑골공원은 아내가 초행이었으나 볼거리는 많지 않다는 핑계로 옆문으로 입장해 정문으로 스쳐 지나듯 나왔다. 사실은 많은 어르신들이 바닥에 침을 뱉고 있었고 일부는 연기를 내뿜고 있어 얼굴 찌푸리며 돌아보기 싫었다.

 탑골공원은 조선 후기 이덕무와 박제가 등 실학자들이 술 한 잔 하며 토론했던 장소이며 3.1 운동 발상지이기도 해 유서 깊은 곳이다. 지금은 어르신들이 장기 두고 막걸리 한잔 하며 지난 세월을 더듬는 장소가 되었다.

 ‘송해 길’ 초입을 지나니 귀금속과 혼수상가가 몰려있다. 어릴 적부터 귀금속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손님은 많지 않다. 요즘은 결혼도 하지 않아 사업하기 어렵겠다는 괜한 걱정도 해본다. 귀금속 상가를 지나면 약국상가가 펼쳐진다. 상가 앞에는 보따리에 신발, 시계, 팔찌같이 팔리지도 않을 중고물건을 깔아 둔 어르신들이 많다. 불경기 탓인지 손님은 없다. 하지만 불경기 탓만은 아닌듯하고 팔릴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는다.


 ‘닭 한 마리’ 골목은 광장시장을 지나 동대문 가기 전인 동대문종합시장에 인접해 있으며 정식명칭인지 몰라도 ‘동대문 닭 한 마리 골목’으로 불린다. 건물은 현대식이 아닌 舊屋(구옥)이며 상인들은 모여 있는 것이 장사가 잘되는지 곱창, 생선구이, 닭 한 마리 음식점들이 서로 모여 있다.

 어느 집이나 맛은 비슷하겠지만 ‘명동 닭 한 마리 시조’ 집에 들어갔다. 인근에 있는 ‘명동 닭 한 마리 본점’과의 관계는 모르겠다. ‘본점’보다 ‘시조’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할 것 같아서다. 아마도 장충동 족발거리와 같이 서로 ‘원조 할머니족발’ 임을 주장하는 상호가 아닐까 추측된다.

 쌀쌀한 날씨와 뜨끈한 국물의 닭 한 마리는 잘 어울린다. 소스를 입맛에 맞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소스 만드는 레시피가 벽에 붙어있지만 식초, 고추양념장, 다진 마늘, 겨자를 듬뿍 넣어 소스를 만들었다. 예전 흥인동에 본사가 있을 때 시간 외 근무를 마치고난 뒤 직원들과 몰려가 소주 한잔하던 소박한 메뉴가 닭 한 마리 칼국수였다. 앉자마자 닭 한 마리를 갖다 준다. 한 마리가 2인분이며 이제는 칼국수를 별도로 주문해야 한다. 점심시간이 지났으나 대기 손님이 있어 식사가 끝나면 바로 일어나야 한다.


 인근에 있는 중앙아시아거리에 갔다.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8번 출구로 나오면 중구 광희동이다. 러시아, 몽골, 우즈베키스탄 음식점이 많고 길거리에는 흰색 외국인들이 많이 서성이는 이국적 풍경이다. 중앙아시아에는 회교권 국가가 많아서인지 메뉴판을 보면 식재료는 양고기와 소고기 일색이다. 식사는 다음기회에 하기로 하고 탄드루에서 구워낸 빵을 하나 구입했다.

 뜨끈하게 구워낸 빵을 조금 떼어 입에 넣으니 바삭하고 식감이 좋다. 기다란 바게트를 중앙아시아에서는 둥그렇게 구워내나 보다. 집에 와서 먹어보니 바삭함은 없어졌고 질깃거린다. 아쉽게도 꿀 케이크를 디저트로 먹으려 했으나 ‘러시아 케이크’ 집은 휴무다.


 다시 을지로를 거슬러 올라 집으로 가는 버스 승차장이 있는 명동성당까지 걷기로 했다. 명동성당 구경? 아니 이미 16000보를 걸었으니 설 나들이로 충분하다. 백수가 한 번에 많은 것을 보려 하면 몸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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