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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가에 앉는 마음 Sep 22. 2024

921. 熟論(숙론)(1) (최재천著, 김영사刊)

갈등 상당 부분 토론 부재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생태학자인 최재천교수가 왜 熟論이란 제목의 책을 발간했을까? 일반적으로 머리말에 작가의 의도가 실려 있으므로 18페이지에 달하는 프롤로그를 꼼꼼히 읽었다.


프롤로그: 혁명 전야, 숙론의 동이 튼다.

 불과 4~50년 전만 해도 동물이 학습능력을 갖고 있다 하면 비웃음을 샀지만 이제는 다르다. 올챙이에서 갓 탈바꿈한 개구리나 두꺼비는 빠르게 움직이는 모든 것에 관심을 보여 스크린에 검은 점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도 혀를 뻗는다. 이는 유전자 수준에서 이미 각인된 행동이다. 우리는 이것을 본능 instinct이라 부른다.

 뒤영벌을 삼켰다가 입천장을 쏘인 개구리나 두꺼비는 평생 뒤영벌처럼 생긴 물체 근처에는 가지 않는다. 비슷한 꽃등에를 봐도 화들짝 놀라며 피해 간다. 이처럼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지혜를 얻지만 거기까지다. 자식이나 이웃에게 지식과 지혜를 나눠줄 줄 모른다. 바로 이점에서 인간과 다르다. 이전 세대가 터득한 지식과 지혜를 다음세대에 전달해 시행착오와 발견을 반복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출발선을 이전 세대가 전진한 곳까지 옮겨놓고 거기서 시작하는 유일한 동물이며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이다


 동물들은 가르치지 않고 기다린다. 둥지를 떠나는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둥지 저만치 날아가 새끼기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침팬지가 견과류를 돌로 깨먹는 모습을 어린 침팬지가 지켜보고 배운다.

 인간 부모라면 다짜고짜 원리설명부터 해댈 것이며 빨리 습득하지 못하는 아이에게는 짜증을 낸다. 동물들은 시범을 보이고 지도하느라 애쓰지 않고, 아이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체득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줄 뿐이다. 

 인간은 이런 과정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학교를 만들었다. 동물의 극히 일부도 가르치기는 하지만 인간처럼 교육학으로 발전시킨 경우는 없다. 이렇듯 인간교육의 위대함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최근 우리 교육의 혁명적 변화가 필요할 만큼 고질적 폐해를 드러내고 있다. 모두를 가르치려다 보니 획일화와 표준화가 배움의 본연을 망쳐 버렸다. 


 서양에서는 일찌감치 학생주도 학습방식을 도입했다. 자연스레 다양한 형태의 학생중심토론수업으로 이어진다. 하버드 유학시절, 거의 모든 수업에는 학생중심토론이 포함되어 있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조교시절에는 학생중심토론을 이끌었다. 이후 하버드, 미시건대 교수시절에도 내 수업을 학생중심토론으로 기획했다. 그러나 서울대 복귀 후에는 강의 중심수업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으나 내 모든 수업의 책임을 홀로 감당할 시기에는 미국식 토론수업을 도입했다. 


 나는 대한민국 교육이 안고 있는 온갖 문제점은 물론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갈등도 상당 부분 토론 부재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학교에 가면 갈수록 창의성이 줄어드는 우리 교육의 모순을 타개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안으로 토론학습을 제안한다. 대학입시가 완벽하게 목줄을 쥐고 있는 우리 고등학교 교실환경에 토론수업을 정착시키는 일은 불가능에 보인다.  하지만 선거권을 18세로 낮췄으므로 잘 기획된 정치토론을 고등학교 교실에서 할 수 있다면 우리 교육이 그토록 원하는 창의성 교육의 물꼬가 트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토론 수업을 진행할 교사들을 위한 교육이 시급하다. 교실을 정치판 싸움터처럼 만들지 않도록 하는 책임이 교사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토론 교육을 받아본 교사가 없으므로 교사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역사에 토론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군왕이 신하와 함께한 공부모임이었던 경연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불러 강론으로 공부하는 목적도 있었으나 세상물정을 파악하고 제도 정책을 토론하는 기회로 활용되기도 했다. 종종 하루 3번씩 경연을 벌여야 했던 군왕들은 치열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 치열함이 조선을 518년 동안 지켜낸 힘이었다고 본다. 학교 교실에서 시작된 토론학습이 사회로 번져 우리 민족의 탁월한 역량이 부질없는 갈등구조 속에서 낭비되는 게 대폭 줄어들리라 생각했다. 나는 이런 절박함에 이 책을 집필했다.


 우리 사회에서 토론문화가 사라진 가장 결정적인 책임은 일제강점기 교육이 제공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학문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식민화를 위한 획일적 교육에 집중하느라 토론 학습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일본은 우리말을 말살하고 철저한 주입식 교육을 실시했다. 30여 년에 걸친 일제교육은 지금까지도 정부주도의 교육제도, 학력 중시등 여러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서양의 Discussion은 남의 얘기를 들으며 내 생각을 다듬는 행위다. 이걸 우리는 토론이라 번역해 사용하는데 우리의 토론은 서양의 Discussion과 다르다. 우리의 토론자세는 심히 결연하다. ‘백지연의 끝장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은 제목부터 모순이다 토론은 끝장을 도모하기 위함이 아니다.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결기로 토론에 임하면 남의 혜안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Discussion이 아니라 논쟁 Debate에 가깝다.

 우리는 논쟁에도 미치지 못하는 언쟁 즉 치졸한 말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다. 討論(토론)에서 ‘討’는 공격하고 두들겨 패다. 비난하다, 정벌하다의 의미를 품고 있으므로 어찌 보면 우리는 제대로 토론해 온 셈이다.

 이 기회에 ‘토론’ 대신 여럿이 특정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충분하게 의논하는 과정을 뜻하는 ‘熟論(숙론, Discourse)’으로 부르기를 제안한다. 


 고 노무현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토론문화 부재를 많이 아쉬워했고 활성화하려 계급장떼며 애썼다.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서 세계최고의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국민들이 토론만큼은 못해도 너무 못하는 이유는 배우지 못해서이다. 

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모든 학습을 토론식으로 진행하는 서양과 달리 우리는 대학졸업할 때까지 토론수업을 받아본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부터라도 학교에서 가르치면 능히 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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