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중구 개항장거리
토요일 아침, 햇살이 유난히 맑았다. 비 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고, 공기는 이른 시간부터 땀 냄새가 날 듯이 후끈했다. 오늘은 인천 근대 건축물 그림 그리기 대회가 열리는 날. 아내는 출근해야 했기에, 두 아이를 데리고 대회에 참가하는 일은 자연스레 내 몫이 되었다.
첫째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 작년 바다 그리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이 작은 잔치를 벌였던 기억도 있다. 그 때문인지 오늘도 아침부터 색연필과 그림도구를 분주히 챙겼다. 지난번 물감이 번져 그림을 망쳤던 기억 탓에 이번엔 과감히 색연필만 들었다.
대회장 근처에 도착하자, 마침 지역 축제까지 겹쳐 근방은 이미 주차 전쟁 중이었다. 몇 바퀴를 돌고서야 겨우 자리를 찾아낸 뒤, 핸드카트에 짐을 한가득 실어 땡볕 속을 걸었다.
대회장은 말 그대로 찜통이었다. 돗자리를 펴고 캠핑용 탁자를 꺼내 아이들 자리를 만들었다. 첫째는 도화지를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었고, 무엇을 그릴지 고민만 하다가 연필도 들지 못한 채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속 건물을 보여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구도로 이렇게 그려보는 건 어때?”
그러자 첫째는 눈을 부라리며 정색했다.
“그럼 아빠가 참가하지, 왜 나보고 그리라고 해?”
말투도 표정도 단호했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꽂힌다.’
이제는 고전이 된 영화 대사가, 그 순간 가슴에 찌르듯 와닿았다. 정색하는 표정이 어쩜 그렇게 아내를 닮았는지. 괜히 한 마디 얹었다가 혼만 나고,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흘러, 첫째는 조용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중간쯤 그렸을 무렵, 주최 측에서 “실내로 이동합니다”라는 안내를 시작했다. 더위에 지친 아이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판단은 옳았다.
그 시각, 아내가 퇴근하고 도착했다. 첫째는 그림을 거의 마무리한 상태였지만, 둘째는 대회가 시작된 후로 줄곧 그림엔 관심도 없이 이리저리 딴짓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누나의 그림을 힐끗 보더니, “나도 그릴래!” 하고 크레파스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단 10분 만에 그려낸 그림은 무아지경에 빠진 낙서 천재의 작품처럼 거침없었다. 종이 위를 질주하는 손놀림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손놀림만 본다면 프로의 기운이 풍기기도 했다. 물론 결과물은 대회 주제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고 어딘가 엉뚱했지만, 그래도 자기 안에 떠오른 이미지를 어떻게든 담아내려 한 흔적은 분명했다.
제출 직전, 제목을 정하는 시간이 왔다.
첫째는 전부터 다양한 색을 칠하다 말고, "무지갯빛 보도블록을 걷는다”라고 중얼거렸었다.
“개항장의 색을 걷다.”
제법 그럴듯했다. 제목 하나로 그림의 분위기가 깊어졌다.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딱 그랬다.
둘째의 그림은 노을빛 바다가 주제였다. “노을 지는 황금바다”라는 제목은 아내가 지어준 것이었고, 둘째는 그저 “바다에 해가 비친 거야”라고 했다. 정말 그런 걸 의도한 걸까, 아니면 어른들만의 해석일까. 정답은 알 수 없었다.
그림을 무사히 제출하고 돌아오니, 아이들은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나는 카트에 짐을 정리하며 문득 생각했다.
이런 하루도 언젠가는 기억으로 남을까.
싸늘한 눈빛도, 황금빛 바다도, 상상속의 보도블럭색들도.
그 순간,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첫째가 눈에 들어왔다.
작고 귀엽기만 하던 아이가 이제는 제법 말도 많고, 자기 생각이 또렷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자기가 그리고 싶은 걸 스스로 선택하고, 끝까지 표현해 내려 애쓰는 모습에 잠시 멈춰 섰다.
조금씩 또렷해지는 취향과 생각, 자아의 형태.
아이 하나가 하나의 사람으로 자라고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언제 키우나, 언제 크나’ 하며 흘려보낸 시간이 어느새 지나, 벌써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도 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