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지무침.

강변의 무코리타(2021)

by 바삭새우칩

퇴근하고 돌아오자 저녁 밥상에 갓 지은 밥과 몇 가지 반찬을 어머니가 차려주셨다. 요즘 어머니는 손주들을 봐주기 위해 우리 집에 함께 지내고 계신다. 식당일을 그만두신 지는 오래지만,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손이 먼저 움직이시는 분이다. 밥을 먹으며 몇몇 대화를 나누던 중, 갓 지은 밥을 후후 불며 입에 넣었을 때 예전에 봤던 [강변의 무코리타]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그 장면 하나가 기억의 파문을 일으키듯, 오래전 내 모습과 감정들이 조용히 떠올랐다.


오기카미 나오코 감독의 [강변의 무코리타]는 전과자 신분으로 사회에 복귀한 야마다 다케시가 바닷가의 작은 오징어 젓갈 공장에 취직하며 시작된다. 공장 사장의 배려로 그는 무코리타 연립주택에 입주하게 되고, 자살한 세입자의 흔적이 남은 방에서 조용히 살아간다. 이웃으로는 수다스럽지만 정 많은 쿠사노, 어린 딸과 함께 사는 미나미, 묘비를 파는 세일즈맨 미조구치 등이 있다. 각자의 상처와 고독을 품은 이들이 밥상을 통해 조금씩 마음을 열고 서로의 삶에 스며든다. 영화는 함께 먹는 식사,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 조용한 연대와 정서적 회복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야마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생존과 회복, 그리고 타인과의 연결이라는 주제가 밥이라는 상징을 통해 고요히 흘러간다. 그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매 끼니를 대충 넘기지 않는다. 시장에서 사 온 식재료를 손질하고, 조용히 밥을 짓고, 누군가의 빈자리를 마주하며 혼자 식사한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20대 초반,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도착한 어느 지방 도시에는 나를 반겨줄 사람도, 기대할 일자리도 없었다. 고졸 학력에 특별한 기술도 없던 나는 그저 먹고살기 위해 허름한 여관방에 짐을 풀고, 친구의 소개로 불법 광고물을 붙이는 일을 시작했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전봇대와 벽을 돌아다니며 땀에 절은 테이프로 광고지를 붙이던 그날들. 첫 달은 아직 월급을 받지 못했고, 당장 쓸 수 있는 돈이 부족했다. 돈이 떨어졌던 첫 주, 편의점에서 가장 저렴한 우유 하나와 단팥빵 하나를 들고 계산대에 섰던 내 모습이, 영화 속 야마다와 겹쳐 보였다.

그도 수중에 돈이 거의 없는 상태로 작은 방에 들어와, 첫날을 빵과 우유로 버틴다. 그 장면을 보며 초코바 하나로 하루를 넘기던 내 과거가 가슴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후부터 작은 부엌에서 정성껏 밥을 짓는다. 혼자 먹는 밥일지라도 대충 만들지 않는다. 그 모습이 좋았다.


우리 어머니는 식당일을 하며 남매를 키우셨다. 냉장고에 반찬을 가득 채워놓은 채로 집을 거의 비우셨다. 반찬이 부족한 날은 드물었고, 그 덕분에 요리를 보고 배울 기회는 자연스레 늘어났다. 결혼한 지금도 우리 집 주방은 내 담당이다. 특별한 레시피나 솜씨를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밥을 짓고 요리를 하는 일,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나름대로 꽤 손이 익었다.


쌀밥이라는 매개체로 이어지는 가족의 온기는 아마 한중일 어디에서나 비슷할 것이다. 매 끼니 하얀 쌀밥이 빠지지 않는 문화 속에서, 밥상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방식이 된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인물도 모두 밥 한 그릇에 각자의 사연을 담아낸다.


끼니를 대충 넘기는 것처럼 보여도, 정성이 담긴 밥상 앞에서는 사람도, 기억도, 관계도 조금씩 달라진다. [강변의 무코리타]에서 밥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삶과 삶을 잇는 매개였다.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반찬, 혼자지만 정성스레 지은 밥, 조용한 식사 속에 오가는 눈빛. 말보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사람 사이의 틈을 메워간다. 나 역시 누군가와 함께하는 밥상을 늘 소중히 여겼다. 결핍으로 시작된 밥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언제나 풍족했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 밥상에 올라오는 반찬이 있다. 바로 오이지무침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것은 어머니의 계절마다 빠지지 않는 여름 레퍼토리였다. 너무 짜지 않게 절인 오이지의 물기를 꽉 짜고 송송 썰어, 마늘과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을 넣어 무쳐낸 그 반찬 하나. 입맛 없는 날에도 오이지 하나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은 가뿐히 비워졌다.


역시나 그날도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오이지무침이 저녁 밥상에 올랐다. 큰딸이 말했다.


"오늘 급식에도 이거 나왔어."


나는 농담처럼 물었다.


"급식 오이지가 맛있어? 할머니가 만든 게 맛있어?"


딸은 한 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똑같아."


딸의 무심한 듯한 대답에 웃음이 났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 입맛엔 오이지 특유의 쿰쿰한 맛이 그리 반갑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 내가 말했다.


"아빤 할머니가 한 게 제일 맛있더라."


딸은 웃기만 했지만, 나에겐 분명했다. 어머니의 오이지무침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입맛 없는 여름날이면, 밥솥에서 한 주걱 퍼 담은 밥을 찬물에 말아 오이지무침 하나 얹어 먹는다. 더운 날엔 기운도 없고 밥맛도 없지만, 후루룩 찬물에 말아 한 그릇 뚝딱 해치우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맛을 다시 느낄 때면 내 어린 시절 어딘지 모르게 든든했던 그 시간들이 조용히 따라온다.


[강변의 무코리타]의 밥상들도 그랬다. 망자의 냄새가 스미는 공동주택 속에서 피어나는 소박한 식탁들. 그것은 상처를 가진 이들이 서로를 마주하는 방식이었고, 삶의 굴곡 끝에서도 이어지는 희망의 징표였다. 말보다 조용하고, 격려보다 따뜻한 식사.


영화는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품고 있지만, 내가 가장 마음에 담아둔 건 그 속에서 '밥을 먹는 사람의 존재감'이었다. 밥상 앞에 앉아 밥을 먹는 순간, 우리는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드는 그 단순한 행위가,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조용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삶을 붙드는 힘이, 바로 그 따뜻한 밥 한 그릇 안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는 또 말해준다. 고독은 결핍이지만, 반드시 비극은 아니라고. 혼자인 사람들, 사연 많은 이들이 나누는 반찬 한 접시, 밥상 위의 조용한 시선, 그 모든 것이 아주 작은 위안이 된다고. 죽음과 삶은 어느 한편에 머무르지 않고 나란히 놓여 있으며,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남겨진 사람의 삶도 달라질 수 있다고.


그리고 어쩌면, 말보다 중요한 건 옆에 앉아주는 일이라는 것. 위로란 거창한 말보다 밥 한 그릇, 반찬 하나일 수 있다는 것. 영화는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누군가가 내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어머니의 오이지무침을 말할 것이다.


한여름, 찬물에 말아낸 밥 위에 오이지무침을 올려 후루룩 넘기던 그 한 숟가락. 그건 언제나 내게로 돌아갈 수 있는 기억의 자리였고, 세상에서 가장 입맛 돋우는 밥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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