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순례길을 걷는다.

영혼의 순례길(2015)

by 바삭새우칩

아내와 아이들은 처가에 갔다. 오랜만에 혼자 남은 토요일 오후. 이상하리만치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게임은 귀찮았고, 책은 글자만 빙글빙글 돌았다. 무의식적으로 TV를 켰지만 액션도, 코미디도,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무료영화 코너에서 낯선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영혼의 순례길'. 이미 손가락은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뜻밖의 순례길에 함께하게 되었다.


영화는 티베트의 한 마을에서 시작된다. 순례길은 의외로 작은 부탁에서 비롯된다. 외지에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니이마 삼촌이 조카에게 말했다. 평생 한 번, 순례를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조카는 그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고, 함께 순례길에 나서기로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도 조카와 함께 걷기로 한다. 집을 고치다 인부가 사고로 사망하자, 전 재산을 들여 보상하고도 여전히 그들의 넋을 기리고자 순례에 나선 남자와, 그의 만삭의 아내, 어린 딸. 죽기 전에 순례길에 오르고 싶다던 노인, 너무 많은 살생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매일 술을 달고 살던 동네 백정 사내까지. 그렇게 세 가족, 열한 명의 순례가 시작된다. 이 여정은 누군가의 고독한 속죄가 아니라, 고통과 속내를 나누는 이들의 조용한 동행이었다.

그들의 걸음은 고요하지만 힘찼다. 걷는 동안 만삭의 그녀는 출산하고, 아이가 태어난다. 순례길의 초입에 생명이 움트는 그 장면은, 이 여정이 단지 고통만을 품고 있지는 않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무거운 숨결 속에서도 그들의 발걸음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여정의 끝자락에 다다라, 한 노인이 길 위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그의 시신은 전통 티베트 방식에 따라 천장 된다. 그들의 목적지인 카일라스 산마루로 옮겨진 육신은 천천히 해체되고, 독수리들이 날아든다. 그것은 어떤 잔혹함이 아니라, 더 이상 쓸모없는 육신을 자연에 되돌리는 순환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남겨진 이들은 울지도, 통곡하지도 않았다. 다만 깊은 절을 올리고, 다시 길 위에 나섰다. 탄생과 죽음이 먼 곳에서 마주한 듯 이어졌고, 다시 순례의 수는 처음과 같은 열한 명으로 돌아온다. '공수래공수거', 먼지에서 와 먼지로 돌아가는 인간의 굴레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그리고 그런 죽음의 한가운데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영화 속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산사태가 덮치는 순간이다. 낙석이 굴러내리는 소리, 그 앞에 몸을 던지는 아버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떨어지는 돌에 등을 부딪혀가며 막아내는 그 모습은 숭고함을 넘어 처연했다. 그는 다쳤고, 자신은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고 악행이라 부를 만한 일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그 억울함과 원망을 신에게 쏟아냈다. 하지만 다음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다시 순례길에 오른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눈을 뗄 수 없었다.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믿음도, 걷는 이유도. 그저 다시 시작될 뿐이다.


또 하나의 장면은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순례 중 자신들의 트랙터가 교통사고로 박살 났다. 그러나 가해 차량에 급한 환자가 있다는 말에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그 차를 먼저 보내준다. 트랙터 없이 남은 가족은 무거운 짐을 수레에 싣고, 다 함께 그것을 끌며 길을 걸어간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수레를 끌고 온 지점까지 다시 돼 돌아가 처음부터 오체투지를 시작한다. 신념과 책임감이라는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맑고 아주 단단한 믿음에서 비롯된 절대적인 순수함처럼 느껴졌다. 이 세상의 논리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신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내어주는 경외의 태도처럼.

'영혼의 순례길'은 단지 고통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의 철학, 반복 속에서의 깨달음의 기록이라 생각된다. 장양 감독은 이 다큐를 통해 말을 줄이고 시선을 확장한다. 나레이션 없이, 그저 촬영만 하고, 그들의 여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화면을 따라간다. 무릎이 터지고, 손이 갈라지고, 숨이 끊어질 듯한 순간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왜 그토록 긴 길을, 그것도 온몸으로 절하며 걷는가. 그 질문은 끝내 설명되지 않지만, 그들의 얼굴은 점점 맑아진다.


감독은 1년 동안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촬영했고, 완성된 이 다큐는 중국 내 검열로 인해 2년 동안 공개되지 못했다고 한다. 말없이 담아낸 진실이 그토록 불편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가끔 중국 다큐나 영화에서 발견되는 이런 보석 같은 작품들이, 국가 사상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 늦게 세상의 빛을 보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행복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행복은 어디에 있었을까. 도착점에 있는가? 아니면 다시 돌아온 집에서, 무릎과 손바닥이 닳아버린 그 자리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혹은, 그들에게는 애초에 뚜렷한 목적 같은 건 없었던 걸까. 다만 누군가의 안녕을 빌고, 공동체의 평화를 기도하며 걸었던 건 아닐까.


영화는 그 물음에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걷는 동안, 절하는 동안, 그들이 붙잡고 있었던 것은 '의미'라는 단어였을지도 모른다. 삶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 의미를 품고 걸어간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해하려 할수록, 오히려 더 낯설고 멀게 느껴지고 마음속 질문들은 쌓여간다. 그 삶의 방식, 그 믿음의 구조, 그 경외의 태도는 내가 아는 어떤 것과도 달랐다. 그래서인지 더욱 어렵고, 더 깊이 다가온다.


그 낯섦은 오래전 내 기억을 건드렸다. 나는 20대의 마지막 해, 스물아홉에 티베트와 비슷하다면 비슷한 네팔에 간 적이 있다. 네팔이라는 이름이 왠지 있어 보였고, 그냥 그런 느낌 하나로 짐을 쌌다. 당시엔 서른을 넘길 수 있을지도, 마흔 즈음에도 살아 있을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나는 무작정 떠났다.


히말라야, 세계에서 가장 높은 그곳에 닿기 위해 나는 왕복 5일간의 트래킹을 시작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거리란 티베트 순례자들의 왕복 2,000km가 넘는 여정에 비하면 집 앞 편의점에 다녀오는 수준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매일이 고비였고, 매 발걸음이 고행이었다. 그리고 목적지였던 ABC 베이스캠프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면 낯간지럽겠지만, 분명히 어떤 인생의 방향이 조금 바뀐 것은 사실이다. 사랑도, 만남도, 인생도 어쩌면 거대한 의미가 아니라 그런 사소한 방향 틀기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닐까?.


순례자들도 처음부터 큰 목적을 갖고 길을 나섰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걸으면서, 절하면서, 그들의 삶이 조금씩 다듬어지고 틀어졌고, 그 길 위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다큐가 끝났을 때, 방 안은 조용했다. 스크린 너머로 흙과 눈, 고요한 숨결을 지나던 사람들, 그들의 걸음과 기도가 내 안에서 천천히 번졌다. 설명도, 해석도 필요 없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마음 한쪽이 고요하게 흔들렸다.


삶도 그런 게 아닐까. 누군가의 순례, 각자의 고행. 목적은 때로 흐릿해도 괜찮다. 방향이 있고, 걸음이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것이 인생의 작은 오체투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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