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모험의 시간

구니스(1985)

by 바삭새우칩

며칠 전, 오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로, 성인이 된 후에도 간간이 연락을 이어오던 사이였다. 그 친구가 말했다. 예전 동네 친구들이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고, 꼭 얼굴 한번 보자고. 알았다고 말은 했지만, 나는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날, 괜히 마음이 어수선해서 아이들과 집에 남았다. 뭔가 같이 놀아줄 게 없을까 하다가, 얼마 전 사둔 8비트 게임기를 꺼냈다. 어릴 적 오락실 감성이 그대로 담긴 게임기였다. 게임 목록을 훑어보던 중, 익숙한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구니스]. 너무 어려워서 몇 스테이지도 못 가고 늘 포기했던 그 게임.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흘러나온 배경음악은 단번에 기억을 끌어올렸다. [구니스] 특유의 경쾌한 BGM, 어릴 적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봤던 그 영화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린 시절, 그 친구들과 함께 한 명의 집에 모여 둘러앉아 [구니스]를 몇 번이고 돌려 봤던 기억이 있다. 살던 동네에서 좀 멀리 있던 작은 비디오 대여점에서 그 테이프를 정말 자주 빌렸다. 어쩌다 반납하고 며칠 지나면 또다시 빌려오는 일이 반복됐다. 그 정도로 우리는 그 영화를 좋아했고, 매번 처음처럼 웃고 재밌게 보곤 했다. 지직거리던 화면, 서로 등을 떠밀며 만들었던 뒷산 기지. [구니스]는 그 시절 우리를 한데 모아주던 작은 세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구니스]는 단지 어린이 모험영화가 아니었다. 외계인과 아이들의 우정을 그린 'E.T.', 괴현상을 파헤치는 아이들을 그린 '기묘한 이야기', 미스터리한 사건에 휘말린 소년들의 여름을 다룬 '슈퍼 에이트'처럼, 이 영화들은 모두 어린 시절의 경계 위에서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공통된 감정을 건드린다. 이들은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들고, 어른이 된 후에도 그 시절의 순수함과 모험심을 불쑥 떠올리게 한다. 비밀기지, 자전거, 해질 무렵의 골목길,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공유하던 순간들. 이런 장면들은 단지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우리의 유년 시절을 되살리는 추억의 조각들이다. 그래서인지, 그 기억이 아주 오랜만에 내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나는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구니스]는 1985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로, 오리건주의 작은 해안 마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당시 아역 배우들로 구성된 캐스팅도 지금 보면 참 화려하다. 훗날 '반지의 제왕'에서 샘 역을 맡은 숀 애스틴,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 활약한 키 호이 콴, 그리고 이후 다양한 영화에서 인상적인 조연으로 활동한 조시 브롤린까지. 오래된 화면 속 그 얼굴들이 반갑고도 놀랍다. 그들은 다락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해적의 보물지도를 따라 모험을 시작한다. 지도에 숨겨진 단서와 지하 터널, 트랩, 그리고 아이들을 쫓는 범죄자 일당까지. 이 유쾌한 혼란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믿고, 위기를 헤쳐 나가며 진정한 우정과 용기를 배운다. 단순한 보물 찾기가 아닌, 어른이 되기 전 마지막 여름날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그 시절 내 친구들과 나는 마치 [구니스]의 주인공들처럼, 동네 뒷산에 모여 기지를 만들었다. 기지라고 해봐야 나뭇가지 몇 개와 판자 조각이 전부였지만, 우리에겐 세상의 끝을 향한 비밀기지였다. 학교가 끝나면 누구랄 것도 없이 하나둘 몰려가 해가 질 때까지 거기서 놀았다. 잡초를 베고, 나무를 쌓아 올려 우리만의 본부를 만들었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뒷산 한쪽에 사용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터널 같은 공간이 있었고, 우리는 그 안을 모험이라 이름 붙이고 들어갔다. 열 걸음도 못 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곤 했다. 누가 먼저 도망쳤는지를 두고 다퉜고, 그걸 또 한참 웃어넘겼다.

온 뒷산을 샅샅이 뒤지며 삐라를 줍던 기억도 있다. 북에서 날아온 전단지를 주워 모아 근처 군부대에 가져다주면 뭐라도 받아올 줄 알았던, 지금 생각하면 순진한 열정. 그 모든 시간들이 모여 우리만의 여름, 우리만의 영화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그 친구들과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왔다. 싸우고 화해하고, 함께 웃고 울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맑았던 웃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엇갈렸다. 한 친구의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 사이에 당시 어른들만의 복잡한 문제가 있었고, 나는 그 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려서 자연스레 그 시절의 혼란을 피해자 마냥 그 사건의 탓으로 돌리며 살아왔다.

그러다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우리 가족은 집 명의 문제와 재개발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결국 동네를 떠나야 했다. 집을 떠난다는 건 단순히 주소가 바뀌는 일이 아니었다. 골목의 냄새, 뒷산의 나무, 친구들과의 말장난과 웃음, 그 모든 걸 뒤로한 채 쫓겨나듯 떠났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다른 친구와 연락을 이어가긴 했지만,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어긋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날 모임에 나가지 않은 걸,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후회하게 된다. 어릴 적 상처라고만 여겼던 기억들도, 이제는 소주 한 잔 앞에서 웃어넘길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사정,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된 채로 남아 있다.

그 친구를 원망했던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아무도 잘못한 건 없었다. 단지, 너무 어렸고, 너무 갑작스럽게 많은 것을 잃었던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을, 그리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멀리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다시 돌아보게 된 [구니스]처럼, 그 모든 일들이 결국은 내 이야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조각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다음번에는, 그 조각들을 꺼내어 친구들과 함께 맞춰보는 자리에 나가볼 수 있을까. 이번처럼 피하지 않고 말이다.

내가 고통스러운 기억이라 여겼던 그 시절이, 이제는 감정의 한 풍경으로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음에 기회가 온다면 도망치지 않고 마주하고 싶다.

흐릿하지만 또렷하게 남은 기억. 그날은 친구들과 함께했던 모험에 대해 밤새 이야기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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