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길 위에서

기쿠지로의 여름(1999), 파송송 계란탁(2005)

by 바삭새우칩

여름이 되면 [기쿠지로의 여름]의 OST, 'Summer'를 자주 듣곤 한다.
오늘도 출근길,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이어폰 속 음악을 들었다.
소낙비라도 쏟아질 듯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사이로, 뜻밖에도 쨍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이 음악은 참 여름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이 든다.
맑고 경쾌한 멜로디 뒤로 여름의 두 얼굴이 스쳐간다.
한쪽엔 태양처럼 뜨겁고 힘찬 기운이 있지만,
또 한쪽엔 짜증과 불쾌함, 그리고 어디에도 숨 쉴 틈 없는 갑갑함이 따라온다.

여름은 언제나, 반은 들뜨고 반은 지치는 계절처럼 느껴진다.


얼마 전, 케이블 영화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파송송 계란탁]을 마주쳤다.
채널을 넘기다 멈춘 그 순간, 익숙한 여름의 공기가 화면을 통해 전해졌다.
여름이라는 배경, 길을 함께 걷는 두 사람, 그리고 어딘지 정서적인 풍경.
[기쿠지로의 여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여름의 결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그날 이후, 두 영화를 나란히 한번 써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나에게 여름이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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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지로의 여름]은 1999년 일본에서 개봉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로, 조용한 소년 마사오가 여름방학 동안 어머니를 찾아 나서는 여정에, 철없고 엉뚱한 중년 남자 기쿠지로가 얼결에 동행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일본의 골목과 들판, 도로를 배경으로 두 사람은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관계를 형성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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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송송 계란탁]은 2005년 개봉한 오상훈 감독의 영화로, 짝퉁 불법 음반 판매로 살아가는 청춘 대규 앞에 어느 날 아홉 살 소년 전인권이 나타나며 시작된다. 인권은 대규에게 자신의 아빠라고 주장하고, 대규는 이를 부정하지만 인권은 '국토 종단'을 함께 해주면 떠나겠다는 제안을 한다. 억지로 시작된 여정은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겪으며 점점 둘 사이에 변화를 만들어낸다.


서로 다른 나라, 다른 이야기지만 이 두 영화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속 여름의 풍경과 닮아 있다.
한 편은 익살스러운 웃음 뒤로 고요한 정서를 품고 있고, 다른 한 편은 서툴지만 진심 어린 눈물로, 감정의 결을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느낌으로 말하자면, 여름 한복판의 뙤약볕 아래서 걷다가 온몸이 끈적해지고 땀이 주르르 흐를 때,
[기쿠지로의 여름]은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서 산들바람을 맞는 순간 같다.


반면 [파송송 계란탁]은 그 그늘 아래에서 갑자기 파송송 썰어 넣고 계란 넣은 뜨거운 라면 한 그릇과 시원한 선풍기를 함께 들이밀며, 내가 느끼려던 여름의 여백을 너무 부담스럽게 채워버리는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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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지로의 여름]은 그런 여름의 한쪽을 보여준다.
뜨겁고 한심한 어른 하나가, 조용한 소년과 함께 길을 나선다.
철없고 우스꽝스러운 장면들 틈마다, 묘하게 스며드는 고요가 있다.
그들의 여름은 골목과 논두렁을 따라 흐르며, 잊힌 감정을 불러내는 풍경처럼 다가온다.
말보다 긴 침묵, 웃음보다 깊은 정서.
햇살 아래의 감정은 그렇게 무심한 얼굴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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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파송송 계란탁]의 여름은 훨씬 더 직접적이고 뜨거운 감정들로 채워져 있다. 인물들은 말보다 감정이 먼저 터지고, 서툰 관계 속에서 울컥거림은 쉽게 차오른다. 뜨거운 여름 한가운데에서 시작된 여정은 땀과 눈물로 얼룩지며, 함께 걷는 길임에도 발맞춤은 자꾸 어긋난다. 하지만 그런 투박함 속에서도 이 영화는 진심을 향해 나아가려는 에너지를 품고 있다. 누군가에겐 그런 표현이 솔직하게 느껴질 수 있고,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이 더 또렷하게 와닿을 수도 있을 거다.


[파송송 계란탁]도 처음엔 기대가 컸다.

여름이라는 배경, 길 위를 함께 걷는 두 사람.

그 설정만으로도 나는 이미 마음을 내주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가 점점 깊어질수록 감정이 흐른다기보다, 끌려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눈물은 너무 일찍 흘렀고, 목소리는 너무 쉽게 높아졌다. 이야기를 더 짙게 끌고 가는 [파송송 계란탁]의 방식도 누군가에겐 더 절절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만, 감정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쪽이다. 배우가 만들어낸 감정보다, 내 안에서 천천히 만들어지는 감정을 더 선호한다.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그 과잉이 내 안에 조용히 움트던 감정의 싹을 툭 꺾어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영화 전문가도 아니고, 이론을 배운 적도 없다.
그저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작은 이야기를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영화들 속에서 종종 느껴지는 감정 과잉이나 신파의 강요는, 때로는 내 감정을 꺼내기도 전에 그 연출이 먼저 다가와 아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조금만 덜어냈더라면, 감정의 여백이 더 깊게 스며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신파라는 건 어쩌면, 감정을 조금 과하게 꺼내 보이려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말없이 내어주던 [기쿠지로의 여름]의 장면이 더 진심처럼 다가왔던 건,
그런 감정의 표현이 더 오래 마음에 남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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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쿠지로의 여름]에서 그 장면이 참 좋았다.
어른들이 벌이는 유치한 소꿉놀이 같은 강변의 야유회.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춤을 추고, 의미 없는 대사를 주고받고, 아이보다 더 철없는 표정으로 떠드는 사람들.
어이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유치함 안에서 오히려 진심이 느껴졌다.
과장된 몸짓 속에서, 어설픈 웃음 뒤에서 기쿠지로의 마음이 아주 천천히, 조용히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그는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아이의 웃음을 위해 자신을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사람.
억지로 울리려 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울컥하게 되는, 말장난 같지만 그런 진심.
영화의 모든 감정과 이야기가 그 순간 하나로 모이는 듯했다.
그래서 그 장면은 더 오래, 선명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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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쉬어 가야 할듯한 계절.

여름은 언제나 나를 느슨하게 만든다.

강한 햇살과 긴 그림자 사이를 천천히 걷다 보면,

마음 한편에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조용히 스며든다.

바쁘지도 않고, 그렇다고 차분하지도 않은, 그저 무심하게 흐르다가도 문득 멈춰 서게 만드는 이상한 계절.

그래서인지, 여름을 배경으로 한 이 두 영화에 자꾸만 마음이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두 영화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건 어쩌면 어불성설이다.

다른 온도, 다른 방식, 다른 마음, 다른 색깔이기에.

그럼에도 미안하지만, 내 마음은 [기쿠지로의 여름 ] 쪽으로 조용히 기울었다.

덜 말하고, 덜 울고, 덜 설명하는 그 조용한 여름이
나에겐 더 오래, 깊게 남았다.


그렇게 영화의 여름은 끝났고, 길은 흩어졌지만
그 계절은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 남게 된다.


이제 우리에게 시작되는 여름이라는 계절은, 그렇게 또 한 번 나를 멈춰 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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