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제국(1987)
요즘 전쟁 이야기로 하루 종일 뉴스가 시끌시끌하다.
어느 쪽이 먼저 쐈네, 누가 민간인을 죽였네, 서로의 주장이 엇갈린다.
그 와중에 아주 잠깐, 피난민의 모습이 스친다.
아이를 업고, 고개를 숙인 채,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들.
그 장면을 보다, 오래전에 봤던 『태양의 제국』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어릴 적 TV에서 우연히 본 영화였고, 그땐 그저 한 아이의 생존기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다르게 다가온다.
나는 그저, 짐을 떠올렸다
[태양의 제국]은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던 시기, 영국인 소년 짐이 전쟁으로 가족과 헤어지고 수용소를 떠돌며 살아남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했고, 당시 열세 살이던 크리스찬 베일이 주인공 짐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전쟁과 제국의 틈에서 보호받지 못한 아이가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는지를, 담담하지만 잊히지 않는 시선으로 따라간다.
나는 그저 이상했다. 왜 웃고 있을까? 왜 그렇게 행동할까?
배경이 어디인지, 시대가 어떤지 제대로 몰랐지만, 그저 그 아이가 전쟁통에 생존하는 이야기로 봤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성인이 된 뒤 다시 그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때 보았던 것이 단순한 생존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상하이, 제국주의, 일본군, 수용소, 공습, 패망.
단어들은 많았지만, 짐이 했던 건 단 하나였다. 살아남는 것.
웃고, 고개를 숙이고, 일본군에게 경례하고, 비행기를 찬양하고 그건 찬양이 아니라 짐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천진난만함과 살기위한 몸부림이였다고 생객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아이에게 선택은 없다.
그저 덜 위험해 보이는 쪽을 택할 뿐이다.
후반부, 또래의 일본 소년, 카미카제 조종사와 짐이 눈을 마주친다.
서로 말을 하지 않지만, 묘한 교감 같은 것이 흐른다.
국적도 다르고, 전쟁의 입장도 다르지만, 그 둘은 너무 닮아 있었다.
둘 다, 전쟁이 만들어낸 아이였다.
이 영화를 두고 ‘일본군을 미화했다’, ‘일뽕 영화다’라는 비판도 있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가 올려다보던 비행기는 멋진 무기가 아니라, 비행기를 좋아하는 아이의 국적없는 동경처럼 보였고,
경례는 존경이 아니라 공포에 대한 반사였으니까.
짐은 누구도 찬양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으려 애쓰던, 한 아이였을 뿐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란.
전쟁이란 단어가 너무 자주 등장하고, 화면엔 미사일의 가격과 드론의 사거리 같은 정보가 먼저 흐른다.
그러다 아주 잠깐, 무너진 건물 옆에 앉아 있는 아이가 스친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약자는 늘 선한가? 강자는 모두 악한가?
과거엔 그렇게 믿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폭력은 누구의 손에도 쥐어질 수 있고, 진실은 늘 흐릿하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어느 쪽 편에도 쉽게 설 수 없다.
그게 비겁한 건지, 그냥 조심스러운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마음이 복잡해지는 건, 지금은 그런 고통조차도 의심받는 시대라는 점이다.
아이의 울음은 연출이라 하고, 죽음은 조작이라 말한다.
고통은 진영 속에서 분해되고, 프레임 안에서 소비된다.
전쟁이 미디어의 재료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무섭다.
[태양의 제국]은 오래된 영화지만, 이상하게 지금과 닮아 있다.
가르치려 하지도 않고, 감정을 강요하지도 않지만,
그 안에는 한 아이가 세상을 견디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합창단 속 짐은 맑고 투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세상이 아직 깨끗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부모와 재회한 짐은 말이 없었다. 눈빛도 달라졌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군에게 발견된 짐은 고아 임시 보호소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마침내 부모님과 다시 만난다.
처음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짐은 조심스레 얼굴을 만지며 "진짜구나..."라고 속삭인다.
살아남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울지 않는 아이는, 어쩌면 이미 다 울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어딘가에 그런 짐이 있을지도 모른다.
국경 근처, 폐허 속, 피난민 행렬 끝자락.
전쟁은 여전히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해본다.
내 한마디로 전쟁이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그건 어쩌면 꽤 오만한 상상일지도 모른다고.
지금 이 지구는, 여러모로 너무 복잡하고, 너무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누군가의 고통이 보이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그저, 짐을 떠올리며 조용히 생각해볼 뿐이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