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느린 나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 (2005)

by 바삭새우칩

요즘 아내와 자주 나누는 이야기는 '인생 2막'에 관한 것이다. 아직 은퇴를 논하기엔 이르지만,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에서 아내는 사이버 대학원 강의나 평생교육관 프로그램을 꼼꼼히 살핀다. 나는 그 옆에서 "나, 소설가가 될 거야" 하고 툭 던지듯 말한다. 막연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마음 한구석은 진심이다.


생각해 보면 마흔 중반에 들어가는 나는 이제 인생의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에 들어서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오래 살아온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많은 걸 늦었다고 여겨왔을까. 그게 문득 부끄러워졌다.


그날도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한 영화가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 처음 봤을 땐 큰 기대 없이 틀었지만, 이상하게도 강한 동기부여를 받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줄거리는 희미하고 장면은 어렴풋하지만, 그때 마음 깊이 무언가가 박혔던 건 분명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 이 영화는 2005년에 개봉했고, 로저 도널드슨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으며 앤서니 홉킨스가 주인공 버트 먼로를 연기했다.

INDI3.JPG

버트 먼로는 뉴질랜드 인버카길의 작은 마을에서 낡은 인디언 스카우트 오토바이 한 대와 살아간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그 기계에 그는 오랜 세월 온 마음을 쏟아붓는다. 손때 묻은 부품, 조심스럽게 기름칠하는 손, 천장 낮은 작업실에 울리는 엔진 소리. 마치 그것만이 그의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이미 60대 중반을 넘긴 그는 미국 유타주 보너빌 소금 평원에서 세계 최고 속도를 기록하겠다는 꿈을 꾼다. 누가 봐도 무모한 목표다.


그가 기금을 마련하려 헐값에 물건을 팔고, 미국 땅에서 잠잘 곳 없이 전전하는 장면들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익숙하지 않은 인생의 국면을 어떻게든 헤매며 지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그의 기록보다, 목표를 향한 애정과 고집을 보여준다. 그 영화를 보던 당시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무언가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고, 그것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예전엔 '도전'이라는 단어조차 쉽게 꺼내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은 많았지만, 생계와 돈이 먼저였고, 늘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달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르다. 금전적으로 큰 무리가 없다면, 일단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모한 결심이 아니라, 이제야 내게 허락한 작은 여유였다. 아내와의 대화 속에서도 그런 변화가 느껴진다. 아내는 자신에게 맞는 수업을 메모해 두고, 나는 “소설가가 될 거야”라는 말을 더 자주, 더 분명히 꺼낸다. 무언가를 꿈꾼다는 것이 더는 사치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INDI2.JPG

버트가 소금 평원 위를 질주하던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 순간만큼은 나이도, 국적도, 빈곤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직 그가 향하는 방향과 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그의 꿈만이 화면을 채웠다. 그때 깨달았다. 진짜 도전은 누구보다 앞서려는 경쟁이 아니라, 나이 때문에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걸.


나는 지금의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모함은 나와 상관없는 일, 도전은 젊은이들만의 이야기. 하지만 이 영화를 다시 보고 난 뒤, 그 생각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꼭 세계 대회를 나가야 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해보는 것. 그렇게 하루를 살아보는 것.

INDI1.JPG

버트 먼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이었다. 나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느린 보통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둘 사이엔 작은 공통점이 있다. 무언가를 향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 아주 느리게라도.

빠르지 않아도 괜찮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사람이어도 괜찮다. 눈에 띄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속도다.


누군가 목표나 도전을 포기하려 한다면, 이 영화를 꼭 권하고 싶다.
"에이, 영화잖아."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는 웃으며 말할 것이다.
"아니. 실화거든."


Burt_Munro_1.jpg

버트 먼로, 뉴질랜드 인버카길 출신의 오토바이 애호가이자 기계 장인은 1967년, 만 68세의 나이에 미국 유타주의 보너빌 소금 평원에서 열린 스피드 위크 행사에 참가해, 1920년형 인디언 스카우트 오토바이로 시속 295.4km의 공식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1000cc 미만 오토바이 부문에서 여전히 깨지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그의 인생은, 그렇게 소금 위에 속도로 새겨졌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떨어진 나뭇잎은 뿌리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