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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정신 Aug 17. 2020

다시 쓰는 M에게

M에게 

 아무래도 네가 다시 시간 내기 힘들 것 같아, 메일을 보낸다. 벌써 두 달이 지났구나. 네 덕분에 그 날 조 변호사님과 상담도 하고 두 달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질문하던 내게 수시로 조언도 해 주고, 갑작스런 나의 요청에 여러 방면으로 성심껏 도와준 일 잊지 못 할 것 같아. 고마워.   

"M에게 네 연락처 알려줘도 되니?"

사실 현주의 입에서 너의 이름이 튀어나온 건 20년 만이었어. 20년 전 너의 생일 밤 이후 나도 물론 네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지. 그런데도 나는 너를 만나겠다고 대답했어. 나의 암이 뇌로 전이되었고, 그 충격으로 엄마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신 지난 4월에.

내 담당의께서 엄마와 이모에게 내가 이제 몇 달 못 살 것 같다고 하셨다고 해. 내가 폐암 수술 후 가장 염려했던 뇌전이란 소식을 듣고 나도 그리 길지 않겠구나 짐작은 했었지. 의식도, 시야도 그리고 생사마저 불분명한 절박한 순간에 가장 시급한 일은 나 없이 남겨질 엄마에 대한 대비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현주에게 믿을 만한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전화했었고.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닌데, 그래도 막상 오랜만에 네 이름을 들으니, 몇 꺼풀 덮인 듯 몽롱한 의식 가운데서도 마음이 진정되더라. 네가 인권 변호사가 된 것은 진작 알고 있었고, 내가 알던 너라면 누구보다 사심 없이 이 일을 도와줄 거라고 믿었지만, 역시 세월이 너무 흘러버려 확신은 하지 못했었어. 혹시 깔끔한 성품의 네가 나와 연관된 일이라 맡지 않겠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었어. 근데 너는 그 길로 지방의 우리 집까지 와주었지. 그런 너에게 내가 어떻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현주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내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라고 긴장한 모습의 너에게 먼저 말을 걸었지. 정말 그랬어. 가끔씩 너를 떠올릴 때도 있었지만, 이번 생에선 다시 못 보는 걸로 알고 살았던 것 같아. 그런데 변호사와 의뢰인으로 다시 만나다니 반백년을 살아도 인생은 하루하루 알 수가 없는 것 같았어. 

너와 엄마의 성년 후견을 준비하는 두 달간 우리는 공적인 이야기만 나누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에게는 그동안 잊고 지내던 대학 시절이 20년 만에 소환되더라. 너는 내성적인 내가 처음으로 고백했던 상대였으니까.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술을 마시고 간신히 전화를 걸어 한 시간 정도 너와 통화를 나눴던 걸 나는 아직 기억해. 그 때 나의 고백에 딱히 승낙도 거절도 하지 않고 묵묵히 대꾸하던 너와 한 시간이나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대던 나. 평소보다 부드러운 어조여서 나는 네가 안심되었었어. 너는 서울에 남고 나는 학교를 마치기 위해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야 했지. 

나의 마지막 학기, 국가고시로 인해 정신없이 바쁜 졸업 학기. 연락이 뜸했던 것이 너와 그렇게 간격이 만들어 버릴 줄은 몰랐어. 네 생일에 전화를 했더니 너의 말투가 예전 같지가 않아 전화를 끊고 현주에게 물었었지.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어. 

그리고 10년 전쯤, 우연히 네가 변호사가 되었고 새로운 사랑도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것이 20년 간 내가 들은 네 소식 전부야.    

지난 석 달 동안 내가 또 연락을 못했지. 미안해. 아픈 엄마와의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느라 경황이 없었어. 그간 내게는 좋은 소식도 있어. 무엇보다 내 건강에 대한 의료진의 예측이 빗나갔어. 지난 달, MRI 검사에서 내 뇌 속의 종양이 모두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났거든. 그저 지금은 감사한 마음뿐이야. 

엄마의 성년 후견은 지금으로선 어려울 것 같지만, 귀한 너의 안식년 기간을 선뜻 우리 가족의 일에 할애해 준 것 죽을 때까지 난 못 잊을 거야. 참고로 주위에선 나는 한 번 죽을 뻔하다 살아난 사람이니 오래 살 것이라고 해. 

지난 이 년 간의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나는 크게 변하지 않았어. 나를 기억한다면 내가 쉽게 바뀌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겠지. 당분간은 재활에 힘써야 하고 되살아난 현생은 여전히 매일매일 시험 보는 것 같아. 어쩌면 평생 금고아를 찬 손오공처럼 매 순간 더 조심하며 살아야 하겠지. 다만 살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해졌어. 엄마보다는 더 오래 살아야 겠다는 마음. 더불어 내 인생도 마무리를 잘 짓고 가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지난 몇 달간 네 덕분에 대학 시절의 나를, 그 시절의 친구들을 떠올리게 되어 행복했었다. 건강해진 내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지 못해 아쉽지만, 어쩌면 이렇게 마무리 하는 것도 코로나 시대에 어울릴 것 같다. 어디에 있건 너와 너의 사랑이 건강하길, 또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있길 기도할게. 

지난 날 나에겐 연락 못한 나의 이유가 있었듯이, 너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너의 이유가 있었음을 이제 아니까.      

다시 한 번 써 본다. 미안했고 고마웠다. 

예전처럼,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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