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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즈 Dec 26. 2021

공백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경험했고, 

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분명히 중요한 어떤 경험을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차라리 그런 경험을 했었다는 것까지

기억이 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기억나지 않는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처럼 몇 분째 

기억과 줄다리기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상하다.

도대체 무엇이 기억 안 나고

무엇이 기억이 난다는 것인가.    

무언가를 했다는 느낌은 남아있는데

그 느낌의 내용이 기억이 안 난다.

     

언젠가 잠에서 깼는데

낯선 방에서 혼자 잠을 자고 있었다.

어제 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오기 직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득 숙취와 함께 두려움이 올라온다.

내가 사고를 친 건 아니겠지?

일어나 방문을 살짝 열어본다.


넓고 환한 거실이 보인다.

벽걸이 TV 옆에 사진들이 놓여있다.

사진 속에서 친구와 친구 와이프를 발견하고

문득 어제 회사에서 회식 후,

이 친구를 만나 술을 먹었고,

이 친구네 집에 와서 또 술을 먹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기억할 수 없는 공백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만났을 때도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경험하게 될 무언가를

생각해봤을 때 상상이 되지 않고

예상할 수 없다면 두려움을 느낀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죽음을 생각하고, 상상했을 때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음은

어떤 느낌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은 공백이었다.     


초등학생 때 이불 속에서

죽음을 생각했었다.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마침 옆집 누나를 따라서

주일학교를 나가면서

천국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고

나는 죽은 후, 천국을 가야만 하기 때문에

천국을 가야만 하는 일들을 해야만 했다.

지옥은 가기 싫었다.


지옥을 안 가려면 착한 사람이 돼야만 했다.

남들이 있건 없건 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고

죽은 후, 천국으로 보낼지, 지옥으로 보낼지

신이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나쁜 짓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면 안 되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친구들이 바뀌고, 가정환경이 바뀌었다.

죽음보다는 소외됨과 무시당하는 것을 더 무서워했고

소외되지 않기 위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나쁜 짓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기 시작했고, 술을 먹기 시작했다.

선배들은 이유 없이 화장실로 불러

멍이 들지 않는 곳만 골라 때렸고,

그 폭력 속에서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 버틸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나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신보다

나의 고통을 함께 공유하는 친구들이

더 소중했다.


친구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일요일은 여행을 가거나 노는 날이었고,

나도 곧 그렇게 되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죽음의 순간을 생각하는 것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삶을 탐험하고, 즐기고, 

투닥 거리는 것이 더 좋았다.


죽음은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마음에 죽음이라는 단어는 없었고,

두려운 것이 없었다.


알 수 없었던 죽음이라는 공백은

친구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다시 친구들과 떨어지고

사회에 나와 혼자가 되었을 때

죽음이라는 공백은 다시 나타났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것에 딱 맞는 답을 찾지만

모든 말들과 이론들은 개념이었고,

그들만의 체험이었다.

그 중에 나의 죽음은 없었다.     


그리고 문득 찾아온 생각은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공백을

친구들이 채웠다가 사라졌듯이

온갖 개념과 그들만의 스토리로 잠시 채웠으나

내 것이 아니었듯이

이 죽음이라는 공백으로 

나는 무엇을 채우려 하는 것인가.     


삶, 삶이었다.

친구들에게 집중할 때 죽음이 잠시 가려졌듯이

죽음에 집중할수록 삶은 가려졌다.  


행동을 멈추고, 생각을 죽이고,  

느낌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죽은 듯이 되었을 때

살아있는 육체에 정신적 죽음을 체험할 때

의식의 대상이 1도 없어졌을 때

고요 속을 통과한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삶이 펼쳐진다.

어느 날 문득 태어나 첫 울음을 토해냈듯이

소리를 내고, 움직이고, 배우고, 생각하고,

세상을 느낀다.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기억해낸다.


그렇게 삶에 다시 집중할수록 

죽음은 다시 가려지는 듯, 하지만

더 이상 전처럼 전혀 알 수 없었던 

두려운 대상이 아니다.


이젠 이불 속에서 죽음을 상상하며 울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체험되며

펼쳐진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속에 죽음이 있다. 


이런 자각은 왔다가 사라진다.

아니다. 가려진다.     


이것은 나만의 체험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개념이다. 

그리고 다시 나의 개념이 된다.

지나간 것들은 전부 개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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