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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진실의 조각들

by 문제적 남자

도형의 손가락이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창밖으로는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12시간 넘게 거의 쉬지 않고 작업했다. 컴퓨터 화면을 가득 채운 문서는 이제 20페이지를 넘어섰다.


"휴식을 좀 취하는 게 어떨까요?" 강수진이 물었다. 그녀는 도형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


도형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끝내야 할 것이 많아요. 시간이 얼마 없잖아요."


"그래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당신의 기억이 더 필요해요."


도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목의 흉터를 만졌다.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차단제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강수진 씨," 도형이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 모든 일에 관여하게 됐나요? 처음부터 다시 말해줄 수 있을까요?"


강수진은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깊은 피로가 묻어났다.


"저는 전자에서 10년 넘게 일했어요. 품질관리 책임자로서, 저는 모든 생산 과정을 감독했죠. 처음에는 평범한 전자 부품 공장이었어요. 그런데 3년 전부터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됐어요. '슬레이트'라는 코드명이 붙은. 처음에는 우리도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어요. 단지 특수 목적의 신경 제어 장치라고만 알고 있었죠. 군사용이라는 것도 알았고요."


"언제 그게 위험하다고 느꼈나요?"


"북한 기술자들이 들어왔을 때요. 물론 그들은 북한 출신이라고 소개되지 않았어요. 단지 '특별 자문단'이라고만 했죠. 하지만 저는 그들의 억양을 알아차렸어요. 제 할아버지가 북한 출신이었거든요."


강수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 기억이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는 듯했다.


"그리고 실험이 시작됐어요. 직원들 중 일부가 '의료 검진'을 받기 위해 선택됐죠. 그들이 돌아왔을 때, 뭔가 달라졌어요. 작은 변화였지만, 저는 알 수 있었어요. 그들의 눈빛이 달랐어요."


"기억 조작 실험이었군요."


"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은 '기억 재구성 프로토콜'의 초기 테스트를 직원들에게 시행하고 있었어요. 위험한 기술을 개발하면서, 그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직원들의 기억을 조작한 거죠."


강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저는 그들이 만드는 것이 단순한 군사 기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들은 사람의 기억을 통제하는 도구를 만들고 있었어요. 역사를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도구를요."


도형은 그녀의 말을 받아적었다. 이것은 기사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언론에 제보했군요."


"네. 하지만 쉽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어디에도 연락하지 못했어요. 모든 통신이 감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결국 재민 씨를 만났죠. 그는 여러 차례 공장 주변을 취재하러 왔었어요."


"어떻게 그를 믿을 수 있었나요?"


"직감이었어요. 그리고 절박함이었죠. 누군가에게는 말해야 했으니까요."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널리즘의 본질이 그것이었다.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


"그래서 우리가 4월 13일에 현장을 방문했고, 화재가 일어났군요."


"네, 화재는..." 강수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일어났어요. 저는 당신들을 바깥에서 만나 더 많은 정보를 주려고 했어요. 하지만 만나기도 전에 폭발이 일어났죠."


"폭발이요? 화재가 아니라?"


"처음에는 폭발이었어요. 3층 실험실에서요. 그리고 화재가 번졌죠. 공장 내부에는 인화성 물질이 많았어요. 안전 규정을 무시했으니까요."


"의도적인 폭발이었을까요?"


강수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신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의심스러웠죠. 언론이 취재하러 온 바로 그날에..."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도형과 강수진은 긴장했다. 하지만 곧 윤상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희예요. 물품 가져왔습니다."


강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이 열리고 윤상우와 장효주가 들어왔다. 그들은 식료품과 장비가 든 가방을 들고 있었다.


"마을에 다녀왔어요." 장효주가 말했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윤상우는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 중요한 소식이 있어요."


그는 노트북을 열고 뉴스 사이트를 보여주었다.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정부, '국가 위기관리 체계 강화' 특별법 발의... 대테러 및 국가안보 위협에 신속 대응」


"이게 무슨 의미죠?" 도형이 물었다.


"클린슬레이트가 더 많은 권한을 얻으려 하고 있어요." 윤상우가 설명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그들은 '국가안보 위협'이라는 명목으로 더 광범위한 기억 조작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조직이 어떻게 법적 권한을 얻나요?"


"겉으로는 국정원의 특수 임무팀으로 위장하고 있어요." 강수진이 말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도 클린슬레이트의 실체를 모르죠. 그들은 단지 '국가 위기관리팀'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도형은 이 정보를 기사에 추가했다. 퍼즐 조각이 점점 더 맞춰지고 있었다.


"이건 우리의 시간이 더 없다는 뜻이에요." 장효주가 말했다. "법안이 일주일 내로 국회에서 논의됩니다."


도형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최대한 빨리 기사를 완성하겠습니다."


"당신 혼자 이 일을 감당하기엔 너무 위험해요." 강수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도형이 미소지었다. "당신들이 있잖아요."


날이 어두워졌다. 도형은 계속해서 작업했다. 그는 이제 기사의 결정적인 증거 부분을 작성하고 있었다. 정부 문서, 계약서, 희생자 명단, 그리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는 부분이었다.


밤 11시, 갑자기 모든 전등이 꺼졌다. 암흑이 내려앉았다.


"정전이야?" 도형이 물었다.


"아니요." 윤상우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자체 발전기를 가지고 있어요. 누군가 전원을 차단했다는 뜻이죠."


도형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들이 찾아온 것일까?


"대피해야 해요." 강수진이 속삭였다. "모두 비상 계획대로 움직이세요."


어둠 속에서 장효주의 손전등이 켜졌다. 그녀는 바닥의 일부를 들어올렸다. 숨겨진 출구였다.


"이 터널로 내려가세요." 그녀가 지시했다. "도형 씨, 당신 노트북과 자료를 챙기세요."


도형은 서둘러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중요 문서들을 모았다. 쪽지 하나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이건 백업 은신처 위치예요." 윤상우가 속삭였다. "우리가 헤어지게 되면, 그곳으로 가세요."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차례로 지하 터널로 내려갔다. 터널은 좁고 습했지만, 충분히 한 사람이 기어갈 수 있었다.


"이 터널은 어디로 연결되나요?" 도형이 물었다.


"500미터 떨어진 계곡으로 이어져요." 장효주가 대답했다. "거기에 비상용 차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터널을 절반쯤 지났을 때, 머리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산장을 수색하는 소리였다.


"서두르세요." 강수진이 재촉했다.


그들은 더 빠르게 움직였다. 마침내 터널의 끝에 도달했다. 장효주가 출구를 열자 차가운 밤공기가 밀려들었다. 그들은 계곡 아래쪽으로 나왔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차량은 저쪽이에요." 윤상우가 손짓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계곡을 따라 이동했다.


갑자기 숲 속에서 빛이 비쳤다. 손전등이었다.


"엎드려요!" 강수진이 소리쳤다.


그들은 급히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도형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분리해야 해요." 강수진이 결정했다. "한 명이라도 탈출해서 정보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럴 수 없어요." 도형이 항의했다. "다 같이 가야—"


"이건 토론할 문제가 아니에요." 강수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당신은 윤상우와 함께 북쪽으로 가세요. 장효주와 저는 그들의 주의를 다른 쪽으로 돌릴게요."


도형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윤상우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야 합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해요."


도형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윤상우는 북쪽으로, 강수진과 장효주는 남쪽으로 갈라졌다.


어둠 속에서 도형과 윤상우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외침과 발자국 소리, 그리고... 총성?


"멈추지 마세요." 윤상우가 속삭였다. "계속 가야 합니다."


그들은 한 시간 넘게 산을 오르내렸다. 마침내 작은 도로에 도달했다. 거기에는 낡은 트럭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이게 우리의 탈출 수단입니다." 윤상우가 말했다.


그들은 트럭에 올라탔다. 윤상우가 엔진을 켰다.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수진 씨와 장효주 씨는 괜찮을까요?" 도형이 물었다.


윤상우는 잠시 침묵했다. "그들은... 프로페셔널입니다.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의 목소리에서 확신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나요?"


"서울이요." 윤상우가 대답했다. "가장 안전한 곳은 때로는 가장 위험한 곳의 한가운데입니다."


도형은 자신의 노트북을 꽉 쥐었다. 진실을 담은 이 기계가 이제 그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이 되었다.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도형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산속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일출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강수진과 장효주에게 가 있었다.


"제 기사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을까요?" 도형이 물었다.


윤상우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요. 우리는 이미 모든 준비를 해뒀습니다. 당신의 기사가 완성되면, 동시에 여러 해외 서버에 업로드될 겁니다. 그리고 국내외 인권 단체와 언론사에 동시에 배포될 거고요."


"그들이 또다시 기억을 지워버리면 어떻게 되죠?"


"모든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어요. 특히 이제는 해외에서도 알게 될 테니까요." 윤상우가 잠시 침묵했다가 덧붙였다. "게다가 우리는 해독제를 개발 중이에요."


"해독제요?"


"네. 김지현 선생님이 연구하던 것이었어요. 기억 조작을 되돌릴 수 있는 약물이죠.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있어요."


도형의 마음에 희망이 피어올랐다. 지워진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니. 그것은 단순히 진실을 알리는 것을 넘어, 희생자들에게 정의를 돌려주는 일이었다.


트럭은 계속해서 달렸다. 도형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딘가에서 42명의 희생자들의 영혼이 그와 함께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기사는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 진실은 반드시 알려져야 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요?" 도형이 물었다.


윤상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미 우리는 이기고 있어요. 그들이 아무리 기억을 지워도, 진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태양이 완전히 떠올랐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도형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단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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