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아침은 언제나처럼 분주했다. 출근하는 사람들,학교로 향하는 학생들, 도시의 리듬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도형에게 세상은 이제 완전히 달라 보였다. 모든 건물, 모든 CCTV, 모든 스마트폰이 잠재적인 감시 도구로 느껴졌다.
윤상우는 강남의 한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으로 트럭을 몰았다. 차를 세우고 엔진을 껐다.
"여기가 어디죠?" 도형이 물었다.
"김지현 교수의 비밀 연구실입니다. 대학에서 쫓겨난 후에도 그는 계속 연구를 진행했어요."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으로 올라갔다. 윤상우는 특별한 키카드로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최첨단 장비들이 가득한 연구실이 나타났다. 하지만 먼지가 쌓여 있었다. 한동안 사용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김교수는 어디 계신가요?" 도형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윤상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이곳을 떠났어요. 클린슬레이트가 그를 찾아냈을 때, 그는 연구 자료를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우리에게 연락이 오지 않은 지 이미 3주가 지났어요."
도형은 심장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또 한 명의 희생자인가.
"하지만 그의 연구는 여전히 이곳에 있습니다." 윤상우가 덧붙였다. 그는 벽에 있는 숨겨진 금고를 열었다. 안에는 노트북과 작은 금속 케이스가 있었다.
"이게 뭐죠?"
"김교수의 마지막 연구 결과입니다. 클린슬레이트의 기억 조작 약물에 대한 해독제 프로토타입이에요."
윤상우는 금속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약병에 담긴 푸른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이게... 해독제인가요?"
"네. 아직 임상 실험은 거치지 못했지만, 김교수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기억 조작을 70% 이상 회복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윤상우는 노트북을 켰다.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화면이 켜졌다. 그는 복잡한 분자 구조와 차트가 가득한 파일들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해독제의 제조법입니다. 당신의 기사와 함께 이 정보도 공개할 계획이에요. 그렇게 되면 어떤 제약회사라도 이 해독제를 만들 수 있게 될 거예요."
도형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이건 단순한 폭로를 넘어서는 일이군요.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맞습니다.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을 치유하는 일까지 해야 합니다."
도형은 창가로 걸어갔다.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클린슬레이트의 영향을 받았을까?
"기사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도형이 결심했다. "지금 바로요."
윤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는 안전합니다. 최소한 몇 시간은요. 저는 강수진 씨와 장효주 씨의 소식을 알아보겠습니다."
도형은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그는 지금까지수집한 모든 증거와 증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클린슬레이트의 기원, 전자와의 연결고리, 북한 과학자들의 참여, 그리고 42명의 희생자 명단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음모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도형은 거의 부산스럽게 작업했다. 오후가 되었을 때, 그는 마지막 단락을 작성하고 있었다.
"윤상우 씨," 도형이 불렀다. "다 끝났습니다. 기사가 완성됐어요."
윤상우는 전화통화를 마치고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무슨 일이죠?" 도형이 물었다.
"장효주가 체포됐습니다." 윤상우가 힘없이 말했다. "강수진 씨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어요."
도형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들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네. 그들은 우리가 탈출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줬습니다." 윤상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우리만 남았군요."
"그럼 계획을 실행해야 합니다." 도형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요."
윤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른 노트북을 꺼내 켰다. "이 컴퓨터로 당신의 기사를 업로드하겠습니다. 해외 서버에 동시에 올라갈 거예요."
그들은 파일을 전송하고 있었다. 진행 바가 천천히 채워지고 있었다. 75%... 80%...
갑자기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이 층에 도착한 소리였다.
"누군가 왔어요." 윤상우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떨렸다.
그들은 숨을 죽였다.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이 오는 듯했다.
업로드 진행 바: 85%... 90%...
"시간이 없어요." 윤상우가 속삭였다. 그는 금속 케이스에서 해독제를 꺼냈다. "이걸 가지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지켜야 합니다."
도형은 작은 약병을 받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우리 모두 탈출해야 해요."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윤상우가 창문 쪽을 가리켰다. "비상 탈출로가 있어요. 화재 계단을 통해 옆 건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먼저 가세요."
"당신은요?"
"저는 업로드가 완료될 때까지 지키겠습니다. 누군가는 여기 남아야 해요."
업로드 진행 바: 95%...
문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국가정보원입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윤상우는 도형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가세요. 당신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도형은 망설였다. 그러나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창문으로 향했다.
"고맙습니다." 도형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모든 것에 대해서요."
윤상우는 미소지었다. "언젠가 우리가 승리한 세상에서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업로드 진행 바: 98%... 99%...
도형은 창문을 열고 비상 탈출로로 나갔다. 그 순간 연구실 문이 강제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100%. 업로드 완료.
도형은 화재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귀에 총성이 들렸다.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거리에 도착한 도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야 할까? 그때 그의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도형 씨." 익숙한 목소리였다. 강수진이었다.
"강수진 씨! 살아계셨군요!"
"제 상태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약했다. "기사는 업로드됐나요?"
"네, 방금 완료됐습니다."
"좋아요. 이제 마지막 단계예요. 서울역으로 가세요. 11번 사물함에 여권과 비행기 티켓이 있어요. 해외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요? 그리고 윤상우 씨는..."
통화가 갑자기 끊겼다. 도형은 다시 걸려고 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택시를 잡아 서울역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뉴스를 확인했다. 아직 그의 기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곧 전 세계가 이 이야기를 알게 될 것이다.
서울역에 도착한 도형은 11번 사물함을 찾았다.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강수진이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형은 4-2-1-3을 입력했다. 희생자 숫자 42, 그리고 4월 13일. 사물함이 열렸다. 안에는 여권과 비행기 티켓, 그리고 약간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티켓을 확인했다. 서울에서 도쿄로 가는 표였다. 출발 시간은 오후 6시. 아직 2시간이 남아있었다.
도형은 역 안의 카페로 들어갔다. 그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창밖으로 경찰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자신을 찾고 있을까?
그의 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문자였다.
「뉴욕타임스, 가디언, 르몽드... 당신의 기사가 세계 주요 언론에 게재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겼어요.」
발신자는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 아직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도형은 자신의 기사가 어떻게 퍼져나가고 있는지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위치가 추적될 수 있었다. 그는 참아야 했다.
5시가 되자 도형은 출국장으로 향했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면서 그는 불안감을 느꼈다. 해독제가 들키지 않을까? 하지만 다행히 아무 문제 없이 통과했다.
그가 탑승구로 걸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의 주목을 부탁드립니다. 현재 공항 전체에 비상 상황이 발생하여 모든 출국 절차가 일시적으로중단되었습니다. 모든 승객은 현재 위치에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형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신을 막으려는 것일까?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분 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출국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도형은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주머니에서 해독제를 꺼내 보았다. 푸른 액체가 담긴 작은 병. 이것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열쇠였다.
그는 결심했다. 스스로 시험대상이 되기로. 도형은 해독제 병을 열고 내용물을 마셨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 초 후, 강한 두통이 밀려왔다.
도형은 머리를 감싸 안았다. 갑자기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그는 기자가 아니었다. 그는 ㅇㅇ전자의 선임 연구원이었다. 클린슬레이트 프로젝트의 핵심 개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기억 조작 약물을 개발한 팀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자신이 만든 기술이 어떻게 악용되는지 목격한 후, 그는 내부고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증거를 수집하고 김재민 기자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클린슬레이트는 그를 찾아냈다. 그들은 그의 기억을 조작했다. 그를 피해자로 만들어 그의 신뢰성을 훼손시키려 했다.
모든 것이 이제 명확해졌다. 도형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았다. 박정도형. 분자신경학자. 내부고발자.
화장실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형은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짧은 메시지를 썼다.
「해독제가 작동합니다. 나는 기억을 되찾았습니다. 내 진짜 이름은 박정도형, ㅇㅇ 전자의 연구원이었습니다.내가 클린슬레이트를 만들었고, 이제 그것을 멈출 것입니다.」
그는 메시지를 여러 연락처로 보냈다. 그리고 전화를 끄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칸마다 확인하고 있었다.
도형은 심호흡을 했다.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문을 열었다.
문 앞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박정도형 씨?" 남자가 물었다.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박정도형입니다."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도형이 대답했다. "저도 당신들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남자는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도형이덧붙였다.
"클린슬레이트의 책임자에게 전할 말이 있습니다. 이제 끝났다고요. 모든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남자는 이어폰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그리고 도형에게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도형은 주저하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그는 이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가 시작한 일을 이제 끝낼 시간이었다.
그들은 공항의 VIP 라운지로 향했다. 문을 열자,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이 보였다. 도형은 그를 즉시 알아보았다. 황민석 장관. 국가정보기획부의 수장이자, 클린슬레이트의 설립자였다.
"앉게나, 박 박사." 황장관이 말했다.
도형은 그 앞에 앉았다.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었다.
"자네가 기억을 되찾았군." 황장관이 말했다.
"네. 해독제 덕분에요."
"김지현의 작품이겠지. 그는 언제나 뛰어난 과학자였어."
도형는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왜 이 기술을 악용하셨죠?"
황장관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악용이라... 그건 관점의차이일 뿐이네. 나는 국가를 보호하고 있었어."
"42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때로 희생이 필요하지."
도형은 분노를 느꼈지만, 차분함을 유지했다. "당신의 일은 이제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클린슬레이트는 끝났어요."
황장관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클린슬레이트는 단순한 조직이 아니야. 그것은 이념이지. 국가 안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이념이야."
"그 이념은 실패했습니다." 도형이 단호하게 말했다. "진실은 언제나 승리합니다."
황장관은 고개를 저었다. "진실... 그것도 결국 기억에 의존하는 것 아닌가? 기억이 바뀌면 진실도 바뀌지."
"더 이상은 아닙니다. 해독제가 있으니까요."
"하나의 해독제가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아."
도형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건 전쟁이 아닙니다. 이건 정의입니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여러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 중에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국제형사재판소 관계자들이 있었다.
"황민석 장관님," 검찰 관계자가 말했다. "당신은 인도에 반한 죄와 국가 기밀 유출, 불법 인체 실험 혐의로 체포됩니다."
황장관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도형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자네가 원한 정의인가?"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진정한 정의는 모든 피해자들이 자신의 기억을 되찾을 때이루어질 것입니다."
황장관이 연행되는 동안, 도형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검찰 관계자가 도형에게 다가왔다. "박 박사님, 당신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해독제에 대해서도요."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더 이상의 비밀은 없습니다."
그날 밤, 도형은 안전한 장소로 이동되었다. 그는 창문을 통해 서울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어딘가에 강수진, 윤상우, 장효주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살아있을까? 그는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새 휴대폰이었다. 검찰에서 제공한. 문자였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 중입니다. 당신이 해낸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세요. - K」
강수진일까? 도형은 미소지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는 노트북을 펼쳤다. 해독제의 제조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새로운 사명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 진실을 찾아주는 것.
창밖으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찾아오는 순간. 도형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마침내, 진실의 시대가 왔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