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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침묵의 생존자들

by 문제적 남자 Mar 16. 2025

별마당 도서관의 높은 천장과 책장들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다. 이도형은 입구 근처 테이블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평일 오후, 도서관은 의외로 한산했다.

학생들, 노트북을 켜놓고 일하는 직장인들, 책을 읽는 노인들. 모두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 5분 남았다. 최미영이라는 여자. 박재민의 친구.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무엇을 알고 있을까?


목의 흉터가 가려웠다. 도형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그것을 문질렀다. 화상 흉터 같으면서도, 너무 규칙적인 패턴이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새겨진 것 같았다.


"이도형 씨."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끊었다. 도형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서른 살 안팎으로 보이는 여성이 서 있었다. 청바지에 검정 티셔츠, 회색 가디건을 걸친 평범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최미영 씨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도형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미영이 앉자마자 그는 물었다. "박재민은 어디 있나요?"


미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모릅니다. 지난주에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전에 이것을 줬고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작고 검은색의 평범한 USB였다.


"이게 뭔가요?"


"모르겠어요. 저한테 당신을 만나면 이걸 전해주라고만 했어요. 그리고 말했죠. '이게 내가 찾은 모든 것이  다 도형 선배가 이걸 공개하지 않으면, 아무도 진실을 알 수 없을 거다.'"


도형은 USB를 받아 들었다. "재민이 이것 말고 다른 말은 안 했나요?"


미영은 주변을 둘러본 후 목소리를 낮췄다. "4월 13일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는... 그날 있었던 일 때문에 괴로워했어요."


도형의 심장이 뛰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미영이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는 말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는 계속 악몽을 꿨어요. 불타는 사람들에 대한 악몽."


"당신은 어떻게 재민이랑 알게 됐나요?"


미영은 잠시 침묵했다. 무언가 결심한 듯, 그녀는 천천히 목의 스카프를 약간 내렸다. 그곳에는 도형과 같은 패턴의 흉터가 있었다.


"저도 그날 있었어요. 저는 공장에서 통역으로 일했어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통역사였죠."


도형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기억나요? 그날 일이?"


"파편적으로요. 불. 비명.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 미영의 눈이 흐려졌다. "그들이 우리를 모았어요. 주사를 놓았고... 그 후로는 거의 기억이 없어요."


도형은 자신이 지금까지 모은 정보 조각들을 연결시켰다. "성수동 전자 하청공장 화재... 39명 사망... 외국인 노동자들... 비상구 봉쇄..."


미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네... 그들은 모두 제 친구들이었어요.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네팔에서 온 노동자들... 그날 죽은 건 정확히 39명이 아니에요."


"몇 명인가요?"


"42명." 미영이 주변을 살폈다. "기록에서 지워진 3명이 더 있어요. 불법 체류자들이었거든요. 공식 명단에도 없었죠."


도형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정부가 이 사건을 은폐했다고 생각해요? 불법 체류자 때문에?"


미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날... 공장에서 만들던 게 특별했어요."


"특별하다니요?"


"군용 전자부품이었어요. 외주 받은 정부 프로젝트였죠. 하지만 안전 기준을 지키지 않았어요. 원가 절감을 위해 위험한 화학물질을 사용했고, 그게 화재의 원인이 됐죠."


도형은 점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국방 관련 비리가 드러나면 정부 측 책임자들이 처벌받아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불법 체류자들에게 군용 부품 제작을 맡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국제적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기록을 지우고, 우리의 기억까지 조작한 거군요."


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저도 혼란스러웠어요. 악몽만 계속 꿨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조금씩 돌아왔어요. 그리고 다른 생존자들을 찾기 시작했죠."


"다른 생존자들이요?"


"우리는 모임을 가지고 있어요. '4월 13일 생존자 모임'이라고 해요. 그날 공장에 있었던 사람들, 취재했던 기자들, 구조 작업에 참여했던 소방관들... 모두 같은 흉터를 가진 사람들이죠."


도형의 눈이 빛났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찾던 결정적 단서였다. "그 모임에 가볼 수 있을까요?"


미영이 망설였다. "위험할 수 있어요.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42명의 죽음이 그냥 역사에서 지워져서는 안 돼요."


미영이 그를 자세히 살폈다. "왜 이러는 거예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당신도 기억을 지웠잖아요. 편하게 잊고 살 수도 있는데."


도형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20년간 취재했던 수많은 참사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세월호, 이태원 참사, 수많은 산업 재해 현장들... 그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기록하기 위해.


"제가 기자가 된 이유는 기록하기 위해서예요. 잊혀서는 안 되는 것들을 기록하는 것이 제 일이었죠. 그들이 그 권리를 빼앗아갔어요. 42명의 죽음을 그냥 지워버렸어요. 그것을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미영의 눈에서 경계심이 조금 풀렸다. "알겠어요. 내일 밤 8시. 망원동 골목 끝 창고 건물 지하. 그곳에서 모임이 있어요."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가지 더요." 미영이 가방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이건 특수 제작된 차단제예요. 목의 흉터에 바르세요. 그들이 추적하는 걸 방해합니다."


"추적이요?"


"네. 그 흉터는 단순한 화상이 아니에요. 일종의 추적 장치예요. 우리 모두를 감시하기 위한."


도형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그런 기술이..."


"질문이 많으시네요." 미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모임에서 더 알게 될 거예요. 조심해요. 아, 그리고... 그 USB? 공공장소의 컴퓨터로 열어보세요. 자신의

장비는 절대 안 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도형은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재민이 남긴

USB. 목에는 추적 장치라는 흉터. 그의 세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모임의 존재였다. '4월 13일 생존자 모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도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서관 컴퓨터 섹션으로 향했다. 미영의 조언대로, 자신의 노트북이 아닌 공공 컴퓨터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USB를 연결하자 폴더가 하나 열렸다. 그 안에는 여러 파일들이 있었다. 사진 폴더, 문서 폴더, 그리고 '읽어주세요. txt' 파일.


도형은 텍스트 파일을 열었다.


「도형 선배에게,


이 USB를 보고 계시다면, 제가 더 이상 이 진실을 혼자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4월 13일 이후 알게 된 모든 것을 여기에 담았습니다.


첫째, '그들'의 정체입니다. 이름은 '클린슬레이트'. 국가정보원 산하의 비밀 조직입니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정보를 통제하고, 필요하다면 집단 기억 조작 작업을 수행합니다. 이들은 군사적 용도로 개발된 약물과 신경 기술을 사용합니다.


둘째, 흉터의 정체입니다. 그것은 나노 추적 장치입니다. 우리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특정 주파수의 신호를 보내면 강렬한 두통과 공황 발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우리가 사건에 접근할 때마다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셋째, 진실입니다. 성수동 공장 화재는 단순한 산업 재해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북한 기술자들이 불법으로 고용되어 군사용 신경 제어 장치를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드러나면 한국군 고위 장성들과 정부 관료들이 연루된 대형 스캔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 저를 쫓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알려져야 합니다.


'4월 13일 생존자 모임'을 찾아가세요. 그들만이 선배를 도울 수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그리고... 진실을 기록해 주세요, 선배님.


- 박재민」


도형의 손이 떨렸다. 그는 문서를 빠르게 읽고 난 후 다른 파일들을 열었다. 사진 폴더에는 불탄 공장의 잔해, 비밀회의 장면, 그리고 '클린슬레이트'라고 표시된 문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문서 폴더에는 더 충격적인 내용이 있었다. 국방부 내부 서류 복사본, 비밀 프로젝트 계획, 그리고 '기억 재구성 프로토콜'이라는 제목의 문서까지.


그것은 모두 재민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모은 증거들이었다. 도형은 이제 이해했다. 왜 재민이 사라졌는지. 그리고 자신도 곧 같은 위험에 처할 것임을.


그는 미영이 준 차단제를 목의 흉터에 발랐다. 차가운 느낌이 퍼졌다. 일시적인 안전 조치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도형은 USB의 내용을 모두 확인한 후 컴퓨터를 종료했다. 하지만 USB는 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변을 둘러본 후, 옆자리에 가방을 둔 채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에서 그는 새로운 USB를 꺼냈다. 기자들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빈 저장 장치였다. 도형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원래의 USB를 빼고 빈 USB를 넣어두었다. 그러고는 가방을 들고 자연스럽게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바깥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도형은 주변을 살피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누군가 그를 미행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경로를 바꿨다. 백화점을 통과하고, 골목길로 빠지고, 카페에 잠시 들렀다 나오기도 했다.


한 시간 후, 그는 자신이 미행당하지 않는다고 확신한 후에야 모텔을 찾아 들어갔다. 자택으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이미 그들은 그의 주소를 알고 있었다.


모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도형은 노트북을 켰다. 재민의 USB를 연결하고 모든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저장해 둔 모든 증거들, 기사 초안, 인터뷰 기록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기억 재구성 프로토콜' 문서였다. 그것은 특정 약물과 초음파 기술을 조합해 인간의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우거나 조작하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군사 용도로 개발되었으나, 민간인 대상 첫 실험이 4월 13일에 이루어졌다는 내용도 있었다.


도형은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알아낸 모든 것을 종합하려 했다.


1. 성수동 공장에서는 비밀 군사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2. 북한 기술자들이 불법으로 고용되어 있었다.

3. 화재로 42명이 사망했다 (공식 기록 삭제됨).

4. '클린슬레이트'라는 비밀 조직이 사건을 은폐했다.

5. 목격자들의 기억을 지우고 추적 장치를 남겼다.

6. 생존자들이 모임을 만들어 저항하고 있다.


내일 밤, 그는 '4월 13일 생존자 모임'을 만날 것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무엇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어떻게 이 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


도형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이 너무 강해 별을 가렸다. 마치 진실이 가려지는 것처럼.


그는 노트북을 닫고 불을 껐다. 내일은 중요한 날이 될 것이다. 충분히 쉬어야 했다.


하지만 잠들기 전, 도형은 한 가지 확신을 가졌다. 그는 이 이야기를 끝까지 파헤칠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죽음들을 위해, 그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잠에 들기 직전, 그의 귓가에 재민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진실을 기록해 주세요, 선배님.'


그리고 그는 그럴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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