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난 이도형의 첫 감각은 고통이었다. 관자놀이를 파고드는 극심한 두통. 눈을 뜨자 모텔 방의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이건...'
도형은 본능적으로 목의 흉터를 만졌다. 미영이 준 차단제의 효과가 떨어진 것일까? 그는 허우적거리며 침대 옆 테이블을 더듬었다. 바닥에 떨어진 차단제 병을 찾아 열었다. 젤 형태의 물질을 손가락에 묻혀 흉터에 발랐다. 시원한 느낌이 퍼졌다.
5분, 10분이 지났다.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도형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경고였군.'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가 어제 재민의 USB를 보았다는 것을. 그들이 말하는 '특정 주파수의 신호'가 바로 이것이었다. 고통을 통한 경고.
시계를 보니 오전 7시였다. 도형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모텔 창문 너머로 서울의 아침 풍경이 펼쳐졌다.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 등교하는 학생들, 가게 문을 여는 상인들. 일상적인 광경.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42명의 죽음이 지워졌다는 사실을.
도형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김지현과의 약속이 오후 3시, '4월 13일 생존자 모임'이 저녁 8시. 그전에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노트북을 켰다. 인터넷 연결을 꺼둔 상태에서, 어제 재민의 USB에서 복사한 자료들을 다시 검토했다. 이제는 더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은 '기억 재구성 프로토콜' 문서였다. 거기에는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피험자는 NMDA 수용체를 억제하는 케타민 유사 화합물과 해마 영역에 작용하는 특수 진정제를 투여받는다. 이후 표적 기억과 연관된 시각/청각 자극을 제시하며 초음파 신경 조절기를 통해 해당 신경 경로를 선택적으로 억제한다. 이 과정에서 나노 입자 기반 추적 장치를 피부 조직에 삽입,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필요시 원격 신경 자극이 가능하도록 한다.」
학술적 용어로 가득했지만, 도형은 대략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약물과 초음파를 이용해 선택적으로 기억을 지우고, 추적 장치를 삽입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원격 신경 자극'—아마도 그가 방금 경험한 두통 같은—을 통해 통제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군사용 신경 제어 장치에 관한 문서였다. 재민의 메모에 따르면, 성수동 공장에서는 이 장치의 핵심 부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정식 계약이 아닌 비밀 하청으로,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 규정을 무시한 채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기술적 노하우를 위해 소수의 북한 기술자들이 불법으로 고용되어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기억을 조작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그 사건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같은 기술이 사용된 것이다.
도형은 자료들을 정리하며 기사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증거, 증언, 공식 기록과의 불일치, 의문점들... 이것은 그의 20년 기자 경력 중 가장 중요한 기사가 될 것이다.
오전 10시, 도형은 잠시 노트북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새 선불 휴대폰을 구입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 다음 가까운 카페에 들러 음료를 주문했다.
옆자리에서 뉴스를 보는 사람이 있었다. 경제 뉴스였다. "ㅇㅇ전자, 올해 2분기 실적 전망 밝아... 신제품 출시와 해외 수주 증가로..."
도형은 귀를 기울였다. ㅇㅇ전자. 성수동 공장을 운영하던 회사였다. 화재로 42명이 사망했는데도, 그들은 멀쩡히 사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는 새 휴대폰으로 회사 검색을 시작했다. ㅇㅇ전자의 공식 홈페이지, 뉴스 기사, 사업 보고서... 어디에도 성수동 공장 화재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단 한 곳, 지역 신문 작은 기사에서 "성수동 소재 전자부품 공장에서 화재 발생, 인명 피해 없음"이라는 짧은 언급만 있었을 뿐.
도형은 계속해서 검색했다. 희생자들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네팔에서 온 노동자들. 그리고 북한 기술자들. 그들의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를 분노하게 했다.
정오가 되자 도형은 카페를 나와 다시 이동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안전했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 한강공원 반포지구로 향했다. 김지현과의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3시간이 남아있었지만, 미리 가서 주변을 살피고 싶었다.
한강공원은 평일 오후임에도 제법 사람들로 붐볐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찾을 수 있는 작은 휴식처. 도형은 2번 출구 근처 벤치에 앉아 주변을 관찰했다. 수상한 점은 없어 보였다.
오후 1시, 도형의 새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번호는 표시되지 않았다.
"여보세요?"
"이도형 씨입니까?" 여성의 목소리였다. 김지현이 아니었다.
"네, 그런데 누구십니까?"
"저는 장효주라고 합니다. 재민 씨의... 동료예요."
도형의 심장이 뛰었다. 또 다른 관계자였다.
"어떻게 제 번호를 아셨죠? 이건 새로 산 전화인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방법이 있어요. 중요한 건, 지금 당장 그곳을 떠나셔야 해요."
"무슨 뜻인가요?"
"김지현 선생님이 잡혔어요. 그들이 약속 장소를 알고 있어요. 함정입니다."
도형은 벤치에서 일어섰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뜻 보기에 수상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의 직감이 위험을 감지했다.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시간이 없어요. 저는 '4월 13일 생존자 모임'의 일원이에요. 김지현 선생님도 우리 모임 회원이었죠. 어제 그녀가 체포되었어요. 그들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도형은 멀리서 공원으로 들어오는 검은색 세단 두 대를 발견했다. 그들인가?
"어디로 가야 하죠?"
"신촌역 3번 출구. 30분 안에 거기 도착하세요. 빨간 모자를 쓴 여성이 있을 거예요. 그녀를 따라가세요."
전화가 끊겼다. 도형은 주저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하지만 뛰지는 않았다.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서였다.
공원 출구를 나서는 순간, 그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둘이 입구에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도형을 찾는 듯했다.
도형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버스가 막 도착하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버스에 올라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 공원 입구를 지켜보았다.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여전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도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그는 신촌역까지 직행하지 않고, 중간에 두 번 환승했다. 혹시 모를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오후 2시 40분, 도형은 신촌역 3번 출구에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빨간 모자를 쓴 여성이 보였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보는 척하며 서 있었다.
도형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도형을 보자 눈짓만으로 그를 확인하고는 걷기 시작했다. 도형은 그녀를 1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따라갔다.
5분간 걸은 후, 그들은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대학가 근처의 오래된 주택가였다. 그녀는 낡은 빌라 앞에서 멈춰 서서 도형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도형 씨죠?"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장효주 씨인가요?"
"네. 안으로 들어오세요. 안전한 곳입니다."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고 도형을 안내했다. 빌라 내부는 예상외로 깔끔했다. 그녀는 도형을 2층으로 데려갔다. 문을 열자 안에는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도형을 예의주시했다. 젊은 남자 하나, 중년 여성 하나, 그리고 도형의 호흡이 멈출 뻔한 인물—박재민.
"재민아!"
도형은 믿을 수 없었다. 재민은 살아있었다. 다소 수척해 보였지만, 분명 그였다.
"선배님, 여기까지 오셨군요." 재민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이전과 달랐다.
"네가 살아있었어? 모두 네가 사라졌다고..."
"제가 사라진 게 맞습니다.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죠."
재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에도 도형과 같은 패턴의 흉터가 있었다.
"앉으세요, 도형 씨." 중년 여성이 말했다. "저는 강수진입니다. '4월 13일 생존자 모임'의 코디네이터입니다."
도형은 그들 앞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장효주가 물병과 컵을 건넸다.
"우선 사과드립니다." 강수진이 말했다. "당신을 이렇게 급하게 불러내서요. 하지만 김지현 선생님이 체포된 이상, 당신의 안전이 우선이었습니다."
"김지현 씨가 정말 체포됐나요? 언제요?"
"어젯밤이요." 젊은 남자가 대답했다. "저는 윤상우입니다. 저희는 김지현 선생님의 병원을 24시간 감시하고 있었어요. 그들이 들이닥쳤을 때 목격했죠."
"그들? '클린슬레이트'인가요?"
네 사람 모두 놀란 눈으로 도형을 바라보았다.
"이름까지 알고 계셨군요." 강수진이 말했다. "맞습니다. 그들은 국가정보원 산하의 비밀 조직입니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정보를 통제하고, 필요하다면 집단 기억 조작 작업을 수행하죠."
도형은 재민의 USB에서 본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에 안도했다. 이 사람들은 진짜였다.
"그래서 이 모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강수진과 재민이 눈빛을 교환했다. 재민이 대답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생존자들을 보호하는 것. 둘째, 진실을 기록하는 것."
"진실을 기록한다... 어떻게요? 모든 증거는 사라졌고, 우리의 기억은 파편화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기억의 벽'이 필요한 겁니다." 강수진이 말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방 한쪽 벽을 가리켰다. 도형은 그제야 그 벽 전체가 사진, 메모, 스케치, 문서들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마치 형사들이 사건을 수사할 때 만드는 증거판 같았다.
"이것이 '기억의 벽'입니다. 모든 생존자의 기억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전체 그림을 만드는 거죠."
도형은 벽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성수동 공장 약도, 화재 당시 추정 상황도, 42명의 희생자 추정 명단, 클린슬레이트 조직도, 그리고 수많은 메모들이 있었다. 부분적인 기억들, 꿈에서 본 장면들, 본능적인 반응들까지... 모든 조각이 하나의 퍼즐을 이루고 있었다.
"놀랍군요." 도형이 속삭였다. "이걸 언제부터 만들었나요?"
"사건 직후부터요." 장효주가 말했다. "저는 그날 119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이었어요. 처음엔 악몽만 계속 꿨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생존자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우리는 각자의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어요."
도형은 계속해서 벽을 살폈다. 그의 눈에 익숙한 사진 한 장이 들어왔다. 자신과 재민, 그리고 다른 기자가 공장 앞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이건..."
"네, 4월 13일 오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재민이 설명했다. "우리는 제보를 받고 취재차 갔었죠. 화재가 나기 전이었어요."
"제보... 누가 제보했죠?"
재민이 강수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대답했다.
"제가 제보했습니다. 저는 공장의 품질관리 책임자였어요. 그곳에서 일어나는 불법 행위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죠."
"어떤 불법 행위였나요?"
"처음에는 단순한 노동법 위반이었어요. 외국인 노동자들의 초과근무, 안전장치 미비, 그런 것들이요. 하지만 점점 더 깊은 문제를 발견했죠." 강수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군사용 신경 제어 장치를 제작하고 있었어요. 안전 규정을 무시한 채 위험한 화학물질을 사용했고, 심지어 북한 기술자들을 불법으로 고용했죠."
"북한 기술자들요? 왜요?"
"그들이 가진 특수한 기술 때문이었어요. 북한은 생체 신경 조작 기술에서 비밀리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의 지식이 필요했던 거죠."
도형은 믿기 어려웠다. "그럼, 화재는 어떻게 일어났나요?"
네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윤상우가 대답했다. "그건... 우리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합니다. 일부 기억에 따르면 실험 중 사고였고, 다른 기억에 따르면 고의적인 방화였을 수도 있어요."
"방화라고요?"
"증거 인멸을 위한 방화 가능성이 있어요." 장효주가 말했다. "누군가 프로젝트가 탄로날 것을 우려했을 수도 있죠."
도형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단순한 산업 재해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음모였다.
"그럼, 42명의 희생자는... 누구였나요?"
강수진이 벽으로 다가가 하나의 종이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 35명—인도네시아 18명, 캄보디아 11명, 네팔 6명. 북한 기술자 4명. 한국인 감독자 2명. 그리고 문서상 존재하지 않는 불법 체류자 1명."
도형은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읽었다. 라흐마트 수디르조. 프라심 타파. 봉철. 문성호...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숫자가 아니었다.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명단은 어떻게 만든 건가요? 모든 기록이 삭제됐다면서요."
"여러 방법으로요." 재민이 대답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 주변 숙소에 남아있던 개인 물품들, 그리고..."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저는 현장에서 희생자 명단을 적었었어요. 기억 조작 전에 이걸 숨겼죠. 나중에 우연히 발견했고요."
도형은 수첩을 받아 들었다. 그 안에는 재민의 급한 필체로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짧은 인적 사항. 나이, 국적, 가족 관계...
"이 사람들의 가족들은... 알고 있나요?"
"대부분은 모릅니다." 강수진이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가족들에게는 산업 재해로 사망했다고만 통보됐죠. 보상금이 지급됐고요. 북한 기술자들의 가족은... 북한 당국도 그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감독자들의 가족에게는 해외 출장 중 사고로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가 제공됐어요." 윤상우가 덧붙였다.
도형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20년 기자 경력 동안 본 어떤 사건보다도 충격적이었다.
"제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네 사람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어렸다. 강수진이 대답했다.
"당신은 기자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건 진실을 기록할 사람이에요. 이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사람."
"하지만 어떻게요? 어떤 언론사도 이런 기사를 내보내지 않을 텐데요. 그들도 통제받고 있잖아요."
"전통적인 언론은 아니죠." 재민이 말했다. "우리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요. 암호화된 문서를 해외 서버에 업로드하고, 동시에 여러 국제 인권 단체와 언론사에 배포하는 거예요. 한 번에, 동시에."
"그렇게 하면 그들이 모든 정보를 차단할 수 없을 거예요." 장효주가 말했다.
도형은 생각에 잠겼다. 위험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42명의 희생자들을 위해, 그리고 진실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협력하겠습니다." 도형이 결심했다. "제가 가진 모든 증거와 기자로서의 능력을 동원해 이 이야기를 써 내려가겠습니다."
네 사람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어요." 도형이 말했다. "오늘 저녁 망원동에서 모임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또 다른 모임인가요?"
재민과 강수진이 놀란 눈빛을 교환했다.
"망원동 모임은 없어요." 재민이 말했다.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최미영이라는 여자요. 그녀도 생존자라고 했어요. 통역사로 일했다고..."
방 안의 공기가 긴장으로 가득 찼다. 윤상우가 컴퓨터를 열고 뭔가를 빠르게 타이핑했다.
"최미영이라는 이름의 통역사는 공장에 없었어요." 강수진이 말했다. "우리가 확인한 모든 기록에는 없는 이름이에요."
도형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럼 그녀는 누구..."
"함정이에요." 재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이 당신을 유인하려는 거죠."
윤상우가 고개를 들었다. "USB는요? 그녀가 당신에게 USB를 줬나요?"
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재민이 남겼다며 전해줬어요."
"어디 있죠?" 윤상우가 다급하게 물었다.
"여기요." 도형은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윤상우가 USB를 받아 들었다. "이건 트로이 목마일 가능성이 높아요. 열어보셨나요?"
"공공 컴퓨터로 열어봤어요. 그 안에는 클린슬레이트에 관한 정보, 기억 재구성 프로토콜 문서 등이 있었어요."
윤상우는 특수 장비를 꺼내 USB를 연결했다. 화면에 코드들이 빠르게 흘러갔다.
""역시..." 그가 중얼거렸다. "이 USB에는 추적 프로그램이 심어져 있어요. 당신의 위치와 접속한 기기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악성코드죠."
도형은 충격을 받았다. "그럼 그들은..."
"네, 아마 당신의 모텔 위치도 알고 있을 거예요." 윤상우가 말했다. "그리고 USB 내용도 의도적으로 유출된 정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짜와 가짜를 섞어놓은 것 같아요."
"어떤 부분이 진짜고 어떤 부분이 가짜일까요?" 도형이 물었다.
윤상우는 USB 내용을 화면에 띄웠다. "기본적인 클린슬레이트 조직에 대한 정보는 사실인 것 같아요. 하지만 '기억 재구성 프로토콜'은 일부러 과장된 부분이 있어요. 그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방법보다 더 복잡하고 기술적으로 묘사해 놨죠."
"왜 그랬을까요?"
"당신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쓰게 만들려는 의도죠." 재민이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기사가 나가도 음모론으로 치부될 테니까요."
도형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는 속임수에 넘어갈 뻔했다.
"망원동 모임은 함정이었군요. 그들이 저를 잡으려고 했던 거고요."
강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하게도 우리가 먼저 당신을 찾았네요. 하지만 이제 상황이 더 위험해졌어요. 그들은 당신이 함정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숨어야 해요." 장효주가 말했다. "적어도 당분간은요."
"그리고 진짜 기사를 써야 합니다." 재민이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위한 안전한 은신처를 마련해 뒀어요. 그곳에서 모든 자료를 검토하고 기사를 완성할 수 있을 거예요."
도형은 잠시 생각했다. 그의 일상, 그의 직장, 그의 아파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숨어야 한다는 것이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그는 너무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그럼 지금 바로 은신처로 가야 하나요?"
"아뇨, 너무 위험해요." 강수진이 말했다. "그들이 이 근처를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일단 오늘 밤은 여기서 머물고, 내일 새벽에 이동하는 게 좋겠어요."
도형은 동의했다. 그는 자신이 이제 완전히 '토끼굴'로 들어가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듯했다.
"최미영이라는 여자는... 누구였을까요?"
"클린슬레이트 요원일 가능성이 높아요." 윤상우가 답했다. "그들은 다양한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어요. 우리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죠."
밤이 깊어갔다. 도형은 제공된 간이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한 퍼즐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새벽 4시, 윤상우가 그를 깨웠다.
"이동할 시간입니다."
도형은 서둘러 준비했다. 강수진이 그에게 작은 배낭을 건넸다.
"여기 필요한 물품들이 있어요. 그리고 이것도요." 그녀는 작은 바이알을 건넸다. "차단제예요. 목의 흉터에 정기적으로 바르세요."
"이게 정말 효과가 있나요?"
"일시적으로만요. 하지만 그들의 원격 자극을 어느 정도 차단해 줍니다."
그들은 뒷문으로 빌라를 빠져나왔다. 아직 어두웠지만,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장효주가 운전하는 낡은 승합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민 씨는 안 오나요?" 도형이 물었다.
"그는 다른 일이 있어요." 강수진이 답했다. "우리는 각자 맡은 역할이 있습니다."
차에 올라탄 도형은 윤상우와 강수진 사이에 앉았다. 장효주가 조심스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강원도예요." 강수진이 말했다. "산속에 안전한 은신처가 있습니다."
도시를 빠져나가면서, 도형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서울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평소와 같이 일상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42명의 죽음이 지워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진실을 되찾으려는 작은 저항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차는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윤상우가 뒤를 계속 확인했다.
"추적당하고 있나요?" 도형이 물었다.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방심할 순 없죠."
두 시간 동안 그들은 침묵 속에서 달렸다. 도형은 자신이 취재했던 무수한 사건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번만큼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사건은 없었다. 그의 목에 새겨진 흉터가 그것을 증명했다.
아침 7시, 그들은 한적한 국도로 접어들었다. 산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요." 강수진이 말했다.
그때였다. 장효주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앞에 검문소예요."
도로 앞쪽에 경찰차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경찰들이 모든 차량을 검문하고 있었다.
"일반 검문일까요?" 도형이 물었다.
윤상우와 강수진이 눈빛을 교환했다. "아닐 가능성이 높아요. 우회해야겠어요."
장효주는 차를 돌려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었다.
"이 길도 은신처로 갈 수 있나요?"
"네, 조금 돌아가야 하지만요."
차가 산길을 오르는 동안, 도형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며칠 전 재민의 문자 한 통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알 수 없는 산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기요, " 도형이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잡힌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침내 강수진이 대답했다.
"그들은 당신의 기억을 더 철저히 지울 거예요. 그리고 아마도... 모든 증거를 없애기 위해 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수도 있어요."
"죽이냐는 건가요?"
"아니요, 그건 너무 주목을 받을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 수는 있어요. 심리적 조작을 통해서요."
도형의 등줄기로 한기가 내려갔다.
차가 계속해서 산길을 올라갔다.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오전 8시 30분, 그들은 작은 통나무집 앞에 도착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산장처럼 보였다.
"도착했군요." 강수진이 말했다.
그들은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오직 새소리와 바람소리만이 들렸다.
장효주가 열쇠로 문을 열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거실, 주방, 두 개의 작은 방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벽 하나가 완전히 모니터와 컴퓨터 장비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작전 본부예요." 강수진이 설명했다. "여기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죠."
도형은 스위치를 눌러 장비들을 살펴보았다. 고성능 컴퓨터, 암호화된 통신 장비, 그리고 또 다른 '기억의 벽'—이번에는 디지털 형태로 구현되어 있었다.
"인상적이네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마련했죠?"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기억하세요." 윤상우가 말했다. "지지자들이 있어요. 클린슬레이트의 행동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 또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요."
도형은 책상에 앉았다. 그 앞에는 새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이걸 사용하세요." 강수진이 말했다. "완전히 안전한 기기예요. 외부 네트워크에 연결되지 않은 독립 시스템이죠."
"그럼 어떻게 기사를 배포하죠?"
"때가 되면 특별한 방법을 사용할 거예요." 윤상우가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우리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강수진이 큰 파일 상자를 도형 앞에 내려놓았다. "여기 당신이 필요로 할 모든 자료가 있어요. 증언록, 공장 설계도, 비밀 계약서 사본, 그리고 희생자들에 관한 모든 정보요."
도형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수년간의 조사 결과물이 담겨 있었다. 이 사람들은 정말로 오랫동안 이 일을 해왔던 것이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기사를 써요." 강수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진실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우리가 필요한 건 프로페셔널의 손길이에요.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설명해 줄 사람."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자신의 기억에서 지워진 진실을 되찾고, 42명의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것.
"언제까지 완성해야 하죠?"
"3일이요." 장효주가 말했다. "그때 모든 것이 준비될 겁니다."
"3일..." 도형은 중얼거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전쟁터에서도 마감을 지켜왔던 그에게는 충분했다.
"시작하죠." 그는 노트북을 켰다.
장효주와 윤상우는 밖으로 나갔다. 경계 근무를 서기 위해서였다. 강수진만이 도형과 함께 남았다.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제가 아는 한 모든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도형은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조각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4월 13일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창밖으로 햇살이 비쳐 들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도형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42명의 죽음, 그리고 지워진 기억: 성수동 공장 화재 사건의 진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했다. 진실은 어둠 속에 묻혀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도형의 목에 있는 흉터가 가볍게 욱신거렸다. 그는 잠시 멈추고 차단제를 발랐다. 그리고 다시 타이핑을 시작했다.
"4월 13일, 오전 10시 15분. 성수동 한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공식 기록에는 '인명 피해 없음'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4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기억에서 지워졌다..."
'기억의 벽' 앞에서, 도형은 진실을 되살리는 작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