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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기억의 잔해

by 문제적 남자 Mar 09. 2025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한강변 카페의 창문으로 희미한 아침 빛이 스며들었다. 이도형은 여섯 시간 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조각조각 떠오르는 기억들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노트북 화면에는 단편적인 문장들로 가득 찬 문서가 열려 있었다.


- 성수동 ㅇㅇ전자 하청공장 화재

- 39명 사망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

- 비상구 폐쇄됨

- 검은 정장 입은 사람들

- 기억 조작 약물

- 목의 흉터 - 바코드 패턴?


도형은 고개를 들어 카페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 러시아워가 시작되고 있었다. 강변북로에 차들이 줄지어 서기 시작했다. 일상적인 풍경이 지금은 그렇게 낯설게 느껴질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평범한 하루를 시작하는 동안, 그는 방금 자신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참이었다.


목의 흉터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피부가 살짝 돋아올라 규칙적인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바코드 같기도 하고, 회로도 같기도 한 이상한 무늬였다.


문득 현우의 말이 떠올랐다. "박재민은 이미 사라졌어."


도형은 핸드폰 배터리를 다시 끼우고 전원을 켰다. 상대방이 위치 추적을 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재민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다. 전화번호부에서 재민의 이름을 찾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전화받을 수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안내 음성이 들렸다.


두 번, 세 번 더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도형은 문자를 보내봤다.


"재민아, 나 도형이야. 연락 줘. 중요해."


메시지는 전송되지 않았다. '수신자에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도형은 사무실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 당직 데스크만 받을 것이다.


"네, 대한일보입니다."


"안녕하세요, 사회부 이도형입니다. 혹시 박재민 기자 봤어요?"


"아... 이도형 선배님. 박재민 기자는 사직했는데요."


도형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언제요?"


"일주일 전쯤이요. 갑자기 사표 던지고 나갔다던데..."


일주일 전. 그러면 4월 13일 직후였다.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 연락처라도?"


"모르겠어요, 선배님. 인사팀에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고마워요."


도형은 전화를 끊었다. 재민은 분명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다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자신에게 단서를 남겼다. 첨부파일이 있던 이메일.


이메일 앱을 열었다. 재민이 보낸 마지막 메일을 찾았다. '진실을 기록할 수 없다면?' 하지만 첨부파일은 더 이상 다운로드되지 않았다. 서버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였다.


더 이상 카페에 있는 것은 위험했다. 누군가 그를 추적하고 있다면,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현명하지 않았다. 도형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서는 순간, 그는 길 건너편에 주차된 검은색 세단을 발견했다.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분명 도형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운전석의 남자가 시동을 걸었다.


도형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하지만 뛰지는 않았다. 주의를 끌지 않으려 했다. 그는 아파트 단지 사이로 들어갔다. 검은 세단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형은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아파트 놀이터를 지나 좁은 골목으로 빠져나갔다. 세단은 더 이상 차로 따라올 수 없었다. 골목 끝에서 도형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남자가 차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또다시 공황 발작이 시작되려는 조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도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으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까?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그때 머릿속에서 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공황장애는 당신 몸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뭔가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의 정신과 의사, 김지현. 그녀는 전부터 그의 증상이 단순한 직업적 스트레스가 아니라고 말해왔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도형은 방향을 틀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김지현 의사의 병원은 강남에 있었다. 도형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몸은 그를 배신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지하철 안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주변을 경계했다. 모든 승객이 잠재적 감시자로 보였다. 특히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들이 의심스러웠다. 그들의 목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그들도 자신과 같은 흉터를 갖고 있을까?


강남역에 도착했다. 도형은 출구로 향하면서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김지현의 정신건강의학과는 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고층 빌딩 15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다시 불안감이 밀려왔다. 막힌 공간에 갇힌 듯한 느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공황 발작의 시작이었다.


'진정해, 도형. 네가 지금 필요한 건 명료한 정신이야.'


15층에 도착해 의원 문을 열자, 접수 간호사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예약...?"


"김지현 선생님 계신가요? 긴급합니다. 이도형이라고 하면 아실 거예요."


간호사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안쪽 진료실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그녀가 돌아왔다.


"선생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도형은 진료실로 향했다. 김지현(38)은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 너머로 서울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도형을 보자 미소를 지었지만, 그 눈빛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이도형 씨, 무슨 일이죠? 정기 상담일이 아닌데..."


도형은 문을 닫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4월 13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세요?"


김지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녀는 창가에서 돌아서서 진료 테이블 앞으로 와 앉았다.


"갑자기 그 날짜를 왜 물으시나요?"


"제 기억에서 그날이 사라졌어요. 완전히.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더군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세요."


지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작은 리듬을 만들며 두드렸다.


"이도형 씨, 당신은 일주일 전에 상담을 받으러 왔었어요. 4월 14일이었죠. 당신은 극심한 공황 발작을 경험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요?" 도형이 재촉했다.


"당신은 당시 약물에 취한 상태였어요. 이상한 말을 많이 했죠. '그들이 모두 불타고 있었다'라든가, '기록하지 말라고 했다'는 등..."


도형의 눈이 커졌다.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세요?"


지현은 책상 서랍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환자 상담은 항상 녹음합니다. 법적 보호조치죠. 이게 당신의 지난 세션이에요."


그녀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잡음만 들렸다. 그리고 도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취해 있는 듯한, 혼란스러운 목소리였다.


「불... 불이 너무 컸어요. 그들은 모두 갇혀 있었어요. 비명소리가 아직도 들려요. 39명... 39명이... 그리고 그들이 와서... 기록하지 말라고... 국가 안보라고... 그들이 내 기억을 가져갔어요...」


도형은 충격을 받은 채 녹음을 들었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목소리였지만, 그는 그 말을 한 기억이 없었다.


「그들은 약을 주사했어요... 모든 증거를 가져갔어요... 하지만 이건... 이건 살인이에요... 39명의 사람들이... 불법 파견 노동자들... 회사가 숨기려고... 정부가 도왔어요...」


지현이 녹음을 멈췄다. "이렇게 계속됩니다. 당신은 그날 밤 내내 악몽을 꾸는 듯한 상태였어요. 다음 날, 당신은 이 모든 말을 한 것을 기억하지 못했고요."


도형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의 잃어버린 기억 조각들이 하나둘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 녹음본을 복사해주실 수 있나요?"


지현은 고개를 저었다. "법적으로 불가능해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도 그날에 관해 궁금한 게 많았어요. 당신 같은 사례가 지난 주에 여럿 있었거든요. 모두 4월 13일 이후에 갑자기 공황장애를 겪기 시작했고, 그날의 기억이 없었죠."


도형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다른 환자들요? 누구죠?"


지현은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누군가가 엿듣고 있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의사-환자 기밀유지 원칙상 말해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리고 탁자 위에 메모지를 꺼내 뭔가를 적었다.


'내일 오후 3시. 한강공원 반포지구 2번 출구. 혼자 오세요.'


도형은 메모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은 메모를 바로 찢어 휴지통에 버렸다.


"이도형 씨, 제가 당신에게 처방하는 약은 일시적인 도움만 될 뿐이에요. 진짜 치유를 원한다면, 잃어버린 기억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녀는 처방전을 적어주었다. "이 약을 복용하면 공황 발작을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하지만 부작용으로 졸음이 올 수 있으니 운전은 피하세요."


도형은 처방전을 받아들었다. 그곳에는 약 이름 외에도 작은 글씨로 다른 메모가 적혀 있었다.


'당신은 감시받고 있어요. 휴대폰, 노트북 모두 안전하지 않음. 조심하세요.'


도형은 처방전을 주머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지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눈에는 깊은 불안이 서려 있었다. "다음 상담 때 뵙겠습니다."


의원을 나서면서, 도형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의심스러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김지현의 경고가 그의 귀에 맴돌았다. '당신은 감시받고 있어요.'


누가 그를 감시하고 있을까? 왜? 성수동 공장에서 그가 본 것 때문일까? 39명의 희생자. 정부와 기업의 은폐.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아니면 조작된 기억일까?


지하철역으로 향하면서, 도형은 처방약을 받기 위해 약국에 들렀다. 약사가 약을 준비하는 동안, 그는 약국 TV에 나오는 뉴스를 흘끗 보았다.


뉴스 하단에 자막이 흘러갔다. " 전자 공장 리모델링 공사 시작. 지난달 화재 이후 전면 재건축..."


도형의 시선이 고정됐다. 성수동 공장. 화재. 이것은 그가 찾던 단서였다. 하지만 뉴스에서는 인명 피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손님, 약 나왔습니다."


약사의 목소리에 도형은 정신을 차렸다. 약을 받아들고 약국을 나섰다.


이제 그는 두 가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현우의 증언과 자신의 녹취록. 둘 다 성수동 공장 화재와 39명의 희생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뉴스에서는 화재만 인정하고 있었다.


도형은 다음 행동을 결정해야 했다. 김지현과의 만남은 내일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더 많은 정보를 모아야 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가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도형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도형 씨?" 여성의 목소리였다. 낯선 목소리.


"네, 누구신지요?"


"제 이름은 최미영입니다. 박재민 기자님의... 친구예요."


도형의 심장이 뛰었다. "재민을 아세요? 지금 어디 있나요?"


"그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재민 씨가 사라지기 전에 당신 연락처를 남겼어요. 위험해지면 연락하라고..."


"위험하다고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전화로 말하기 어려워요. 지금 어디세요?"


도형은 잠시 망설였다. 이 여자를 믿을 수 있을까? 함정일 수도 있었다.


"강남 쪽에 있습니다."


"한 시간 후에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많아서 안전할 거예요."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전화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그럴게요. 어떻게 알아보죠?"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볼게요. 그리고... 조심하세요. 그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전화가 끊겼다.


도형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는 박재민의 친구라는 여자를 만나야 했다. 이 만남이 그를 진실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데려갈지, 아니면 더 큰 위험으로 몰아넣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약국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코엑스로 가주세요."


택시가 출발하자, 도형은 뒷좌석에 기대앉았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조각난 기억들이 맴돌았다. 불타는 공장. 비명소리.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목에 남겨진 이상한 흉터.


그는 휴대폰을 꺼내 메모 앱을 열었다. 그가 알게 된 사실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김지현의 경고가 떠올랐다. '휴대폰, 노트북 모두 안전하지 않음.'


도형은 휴대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대신 작은 수첩을 꺼내 펜으로 메모하기 시작했다. 아날로그 방식. 디지털 감시를 피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었다.


택시 창밖으로 서울의 풍경이 흘러갔다. 고층 빌딩들, 붐비는 인도,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들. 평범한 일상의 모습. 하지만 도형에게는 이제 그 모든 것이 가면처럼 느껴졌다. 표면 아래에는 더 어두운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은 39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재와 관련이 있었다. 국가가 은폐한 비극. 기억에서 지워진 죽음들.


도형은 결심했다. 그는 그 진실을 파헤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자신을 더 큰 위험에 처하게 할지라도.


코엑스가 가까워졌다. 도형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든, 그는 끝까지 가야만 했다.


최미영이라는 여자.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그녀는 재민에 대해, 그리고 4월 13일의 진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택시가 코엑스 앞에 도착했다. 도형은 요금을 지불하고 내렸다. 별마당 도서관으로 향하면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공황장애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있었다. 진실을 향한 여정이 시작된 이후로, 그의 몸은 더 이상 알 수 없는 공포에 떨지 않았다. 마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치유가 되는 것처럼.


도형은 별마당 도서관 입구에 섰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그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진실일까, 아니면 더 깊은 미로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작은 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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