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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흰 벽의 끝

by 문제적 남자

이도형은 도시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건물 비상계단을 통해 아파트를 빠져나온 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골목길로 향했다. 4월의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는본능적으로 주머니 속 항불안제를 만졌다. 약병이 비어있었다.


한밤중의 연남동은 의외로 활기찼다. 술에 취한 젊은이들, 늦은 배달을 서두르는 오토바이, 24시간 편의점의 형광불빛. 그 모든 일상의 단면들이 지금 그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유리창 너머로 보는 다른 세계 같았다.


"택시 불러드릴까요?"


편의점 점원이 물었다. 도형은 고개를 저었다. 택시는 위험했다. 추적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그것도 교통카드가 아닌 현금으로.


"물 한 병이랑 일회용 휴대폰 충전기 주세요."


도형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취재 과정에서 종종 위험한 순간들을 경험했다. 정치 비리를 파헤칠 때, 대기업 비리를 보도할 때, 군사 기밀에 접근했을 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취재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홍대입구역으로 향하는 길, 그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도형은 잠시 멈춰 섰다. 어디로 가야 할까? 재민에게 연락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전화가 도청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재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직접 접촉은 피해야 했다.


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꺼냈다. 그 안에는 작은 USB가 달려 있었다. 취재 기자들의 비밀 무기. 암호화된 중요 데이터를 보관하는 공간이었다. 도형은 이것을 인터넷 카페에서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지하철은 한산했다. 마지막 열차를 기다리는 몇몇 사람들이 플랫폼에 서 있었다. 도형은 벽에 붙은 광고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당신의 기억을 지켜드립니다. 클라우드 백업 서비스."


그 광고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기억. 그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 4월 13일, 그날에 대한 기억.


열차가 도착했고, 도형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배낭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부팅 화면이 켜지자 그는 재빨리 무선 인터넷 연결을 해제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였다.


USB를 연결하고 암호를 입력했다. 폴더가 열렸다. 그 안에는 수년간의 취재 자료가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2024년 폴더를 열고 4월을 찾았다.


4월 12일 폴더. 4월 14일 폴더.

4월 13일 폴더는 없었다.


도형은 파일 검색 기능을 사용했다. '2024-04-13'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했지만, 결과는 "파일을 찾을 수 없습니다."


털썩 뒤로 기대앉았다. 여기서도 그날의 흔적은 지워져 있었다. 하지만 왜? 무엇이 그렇게 위험한 정보였길래?


그는 화면 하단의 휴지통 아이콘을 클릭했다. 비어있었다. 지워진 파일도 이미 완전히 삭제된 상태였다.


'생각해, 도형. 생각해.'


그는 기억을 더듬어보려 애썼다. 4월 12일, 그는 무엇을 했는가? 노트북의 4월 12일 폴더를 열었다. 그날 그는 청와대 정기 브리핑을 취재했다.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 일상적인 정치 뉴스였다.


그럼 4월 14일은? 해당 폴더를 열었다. 4월 14일, 그는병가를 냈다. 처음으로 공황 발작을 경험한 날이었다. 파일 중에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서 사본도 있었다.


그것이 힌트였다. 공황장애가 시작된 시점이 바로 사라진 날 직후였다. 그날 뭔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열차는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 도착했다. 도형은 노트북을 덮고 내렸다. 그는 지금 당장 누군가를 만나야 했다.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사진기자 정현우. 그는 도형의 모든 취재에 동행했던 사람이었다. 4월 13일에도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플랫폼을 걸어나오는 동안 도형은 주변을 경계했다. 역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새벽 1시, 거리는 한산했다.


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렸다.


"여보세요?" 현우의 목소리가 잠에 취해 있었다.


"현우야, 나 도형이야."


"형?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물어볼 게 있어. 4월 13일에 우리 같이 있었어?"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너무 길게 이어지는

침묵.


"현우야?"


"...형, 그날 이야기하지 말기로 했잖아."


도형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현우는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내가 그러기로 했어? 현우야, 미안한데 난 그날 일을 전혀 기억 못 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줘."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형, 우리 전화로 말할 수 없어. 지금 어디야?"


"디지털미디어시티역 근처."


"30분 후에 상암동 월드컵공원 북쪽 주차장에서 만나. 혼자 와. 휴대폰은 배터리 빼고."


전화가 끊겼다.


도형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진전이 있었다. 그는 월드컵공원으로 향했다.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과 미세먼지가 별을 가렸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기억도 그랬다. 무언가가 중요한 진실을 가리고 있었다.


상암동 월드컵공원은 한밤중에도 조명이 밝았다. 보안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된 것이 보였다. 도형은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북쪽 주차장에 도착하자 현우의 흰색 SUV가 보였다.


차에 다가가자 현우가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빨리 타."


도형이 차에 오르자마자 현우는 출발했다. 그의 얼굴은어두웠다. 평소의 쾌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휴대폰 배터리 뺐어?"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한참을 운전하다가 한강변 인적 드문 곳에 차를세웠다. 엔진을 끄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형, 그날 정말 기억 안 나?"


"응. 전혀."


현우는 천천히 목도리를 풀었다. 그의 목에는 붉은 흉터가 있었다. 마치 화상 자국 같았다. 그것은 이상한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들이 남긴 거야. 기억 제거 과정에서."


"누가?"


현우는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 앱을 열었다. 그리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이야기하면 위험해. 차에 도청장치가 있을지도 몰라.'


도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가 계속 타이핑했다.


'4월 13일, 우리는 제보를 받고 성수동 공장에 갔어.

ㅇㅇ전자 하청공장. 화재가 났었어.'


도형은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불타는건물. 비명소리.


'그 공장에서 39명의 노동자가 사망했어.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 회사 측에서 비상구를 잠갔었어.'


도형의 손이 떨렸다. 39명. 엄청난 인명 피해였다. 그런 대형 참사가 어떻게 보도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우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특수 부대가 와 있었어. 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사람들. 그들은 모든 사람을 통제했고, 우리의 취재 장비를 압수했어.'


도형은 현우의 손을 잡았다.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주사를 놓았어. 기억을 지우는 약물이었던 것 같아. 그리고 이걸 남겼지.'


현우는 다시 자신의 목에 있는 흉터를 가리켰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했어. "이 사건은 국가 안보를 위해보도되지 않을 것이다. 이해하겠는가?" 그리고 우린

서명했어. 비밀유지 계약서.'


도형은 자신의 목을 만져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비슷한흉터를 감지했다. 그는 지금까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형도 서명했어. 우리 모두 그랬어. 하지만 그 약물이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았나 봐. 난 조금씩 기억이 돌아왔어. 하지만 이야기할 수 없었지. 그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도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기억을 지우는 약물? 그건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형, 조심해. 박재민은 이미 사라졌어. 그 사건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하자마자.'


도형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재민. 그가 보낸 마지막 메일. '진실을 기록할 수 없다면?'


현우가 다시 타이핑했다.


'가야 해. 너무 오래 같이 있으면 위험해. 내 충고는 이 일에서 손을 떼라는 거야. 잊어버려, 도형아. 그게 우리 모두를 위한 거야.'


현우는 메모장의 내용을 지우고 도형에게 차에서 내릴 것을 눈짓했다.


"조심해, 형. 그리고... 미안해."


도형은 차에서 내렸다. 현우의 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강변에 홀로 선 도형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기억이 조각조각 돌아오기 시작했다. 불타는 공장.

비명소리.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주사 바늘.


그는 목에 있는 흉터를 만졌다. 그것은 단순한 화상 자국이 아니었다. 마치 바코드처럼 보이는 패턴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목격한 것은 단순한 산업 재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39명의 죽음. 정부의 개입. 기억 조작. 이것은 거대한 음모였다.


도형은 결심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파헤칠 것이다.

기자로서의 마지막 임무로.


그날 밤, 도형은 한강변 24시간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새 문서를 열고 제목을 입력했다.


"기록되지 않은 죽음: 2024년 4월 13일의 진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떨렸다. 불안감이 다시 밀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대처했다. 그는 공황을 억누르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진실이 있다. 활자가 된 진실과,

누군가의 목숨값으로 침묵된 진실. 이 기사는 후자에 관한 것이다..."


그가 몰랐던 것은, 그가 타이핑하는 모든 글자가 실시간으로 누군가에게 전송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카페의 CCTV는 그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가 앉은 테이블 아래에는 작은 감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어딘가, 모니터 앞에 앉은 사람이 이도형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상이 기억을 회복 중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화기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켜봐.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라. 그리고... 그의 주변인들을 준비시켜. 필요하다면 2차 개입을 실행하라."


"알겠습니다, 장관님."


모니터 속에서, 이도형은 계속해서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단호했다. 20년 경력의 베테랑 기자가마지막 기사를 쓰고 있었다.


진실을 향한 그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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