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가지 진실이 있다. 활자가 된 진실과, 누군가의 목숨값으로 침묵된 진실."
노트북 화면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었다. 이도형은 자신의 파일 시스템을 뒤지고 있었다. 20년간의 취재 파일들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내일이면 그는 더 이상 기자가 아닐 테니까.
"제 진단은 공황장애입니다."
의사의 말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항불안제인 미트롤알약 두 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폴더를 하나씩 열어보았다.
'2019 세월호 5주기'
'2022 이태원 참사'
'2023 가리봉동 화재'
각 폴더 안에는 도형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취재 메모, 인터뷰 녹취록, 현장 사진, 그리고 결국 빛을 보지 못한 기사들까지. 수많은 죽음과 재난을 목격한 기록들.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2024년 4월 13일, 미보도 사건'
도형은 이 파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뭔가 이상했다. 그는 한 번도 '미보도'라는 단어를 파일명에 사용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마우스 포인터로 해당 폴더를 클릭했을 때, 파일 크기가 표시되지 않았다.
더블클릭.
「이 파일을 열 수 없습니다. 손상되었거나 삭제되었습니다.」
도형의 호흡이 가빠졌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공황 발작의 전조 증상이었다.
그는 미트롤을 삼켰다. 심호흡을 하면서 공황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왜 하필 이 파일을 볼 때 공황이 오는 걸까?
'2024년 4월 13일'
그날 무슨 일이 있었지?
기억나지 않았다.
도형은 캘린더를 열었다. 4월 13일 일정은 비어 있었다. 메일함을 확인했다. 그날 받거나 보낸 메일도 없었다. 기사 검색을 해봤지만, 그날 자신의 이름으로 송고된 기사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그날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4월 13일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조여오고, 호흡이 곤란해지고,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덮쳐왔다.
"공황장애는 당신 몸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뭔가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주치의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는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도형은 데이터 복구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화면에 로딩 바가 나타났다.
「손상된 파일 복구 중... 39% 완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는 '박재민(기자)'이었다. 재민은 도형의 후배 기자였다.
"선배, 어디 계세요?"
재민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숨이 가쁜 것 같았다.
"집이야. 왜?"
"선배에게 보여드릴 게 있어요. 중요한 거예요. 4월 13일에 관한 거."
도형의 심장이 다시 요동쳤다.
"재민아, 4월 13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배도 기억 안 나세요? 그럼... 그게... 증거예요. 우리 모두 기억에서 지워진 거라고요."
"무슨 소리야?"
"지금 설명하긴 어려워요. 제가 메일로 파일 하나 보냈어요. 열어보세요. 그리고 선배, 조심하세요. 그들이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전화가 끊겼다.
도형은 메일함을 새로고침했다.
새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발신자: 박재민
제목: 진실을 기록할 수 없다면?
첨부파일: 2024_04_13_증거.zip
파일을 다운로드하자마자 컴퓨터 화면이 깜빡였다. 그리고 모든 창이 자동으로 닫혔다. 데이터 복구 프로그램도, 메일도 모두 사라졌다.
대신 화면 중앙에 검은 배경의 창이 하나 열렸다.
「경고: 당신은 제한된 정보에 접근하려 시도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치: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23-14 오피스텔
512호
조치: 1차 개입 팀 파견
상태: 진행 중」
도형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들이 자신의 집 주소를 알고 있었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 왔습니다."
도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아파트 앞에 검은색 승합차가 서 있었다. 차 안에 탄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택배기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노트북을 덮고 서둘러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장소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시 한번 초인종이 울렸다.
"이도형 씨,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대화할 것이 있습니다."
도형은 응급구조용 계단으로 향했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4월 13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가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의 기억에서 지워진 걸까?
도형은 알았다. 이제 그는 다시 기자가 되어야 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사를 쓰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