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의 디테일

꼭대기층의 악마들 - 4화

by 이서하

※ 본 작품 『꼭대기층의 악마들』은 실제 직장 생활에서 모티브를 얻은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 조직, 회사, 장소명 등은 모두 창작이며 실제와 무관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땅값 비싼 동네, 삼정역 앞 17층 빌딩.


그 꼭대기층에는 악마들이 산다.
그리고 오늘, 이손은 그 악마들의 장기판에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오늘의 악마 도감

본 에피소드의 중심이 되는 인물입니다.

강영훈 과장 (38세)

악마별칭 : 기생충

남의 공로에 기생해 자기 몫으로 포장하는 종.

작게 움직이고 크게 챙기는 숟가락 얹기 달인.

살아남는 법은 간단하다—결과만 빼앗으면 된다.


보고서의 마술

사건이 터졌다.
강영훈 과장, 별명 기생충.
그 인간이 이손을 불렀다.

“이손 주임, 사고 났다는 거 짧게 크게만 써. 초두 충격만 주면 돼.”

짧게, 크게.
참으로 회사다운 주문이었다.
짧게 쓰라는 건 대충 쓰라는 말이고, 크게 쓰라는 건 과장하라는 말.
논리적으로는 성립 불가지만, 이곳에선 완벽히 통한다.

이손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단 두 줄.

'숫자에 쉼표까지 맞춰 넣으며 — 그래, 내 강박은 심지어 대충 쓰라는 지시 앞에서도 고개를 들었다.'

잠시 뒤, 그 인간이 또 다가왔다.

“그리고 디테일 보고랑 해결 방안은 따로 정리해. 알았지, 이손아?”

그제야 알았다.
앞에서는 요란하게 사고를 크게 터뜨려 임팩트를 주고, 뒤에서는 디테일한 보고로 수습 과정을 강조해 손실을 작게 보이게 하는 전략.
사고 자체보다 ‘잘 해결했다’는 인상만 남기려는, 강영훈 특유의 보고서 공식이었다.

그리고 최종 보고서의 주인은 — 항상 그 인간이었다.

며칠 뒤, 결재 라인에 올라간 보고서.
작성자: 강영훈.
이손이 손끝에 힘줄 세워 만든 문장들이 반짝이는 표지 하나 뒤집어쓰고 그의 이름으로 제출됐다.

“내 문장이, 내 손끝이,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 이름으로 살아간다.
회사에선 이런 도둑질도 실력이라 불리는가."

회수된 메일

며칠 뒤, 또다시 강영훈이 보고서를 지시했다 “이손 주임, 이번 건도 정리해서 올려. 알아서 깔끔하게.”


이손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움직였다.

숫자, 단위, 문장부호까지 완벽하게 정리된 보고서.

파일을 저장하고, 메일을 열었다.


받는 사람: 강영훈 과장

참조: 한서진 부장, 팀 몇 명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순간, 이손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의도한 실수였지만, 그럼에도 심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몇 초 뒤, 재빨리 메일 회수를 눌렀다.

하지만 아웃룩의 회수 기능은 완벽하지 않다.

이미 열어본 사람에게는 그대로 남는다.


잠시 뒤, 팀 채팅창에 한 줄이 올라왔다.

“이손 주임, 방금 메일 잘못 보내신 거 같아요?”


이손은 곧바로 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강 과장님께만 보내야 했는데… 집중하다 보니 부장님과 팀원분들까지 들어갔네요. 다시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공손한 사과

이손은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강영훈 자리로 다가갔다.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과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과장님 검토 전에 다른 분들께까지 나가버렸네요.”

겉으론 최대한 공손하게.

입꼬리도 억지로 내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미세하게 웃었다.

“사과는 공손할수록 더 아프다.
실수라고 우기면, 누구도 뭐라 못 하니까.”


강영훈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턴 조심해, 이손 주임. 보고 라인 헷갈리면 곤란하잖아.”

그러나 그의 손끝이 덜덜 떨리며 마우스를 쥐고 있었다.

순간 사무실 안 공기가 묘하게 출렁였다.

누구도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메일을 연 순간 느꼈다.
숫자, 서식, 문체 — 이건 ‘강영훈표’가 아니라 ‘이손표’라는 걸.

“내 결과물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
그런데… 과정은 지워지고 결과만 남는다는 게, 참 편리한 방식이기도 하군.”


모두의 눈빛은 애써 무심한 척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마치 속으로 중얼거리는 듯했다.
‘강 과장, 오늘은 당했네.’


냉소

“메일 한 통이면 충분하다.
실수인 척 던진 돌멩이 하나가 물결을 만든다.
내 이름을 훔치는 건 쉬워도, 내 문체까지는 훔치지 못한다."


강영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척 서류를 넘겼다.
그러나 이손은 봤다.
종이를 넘기는 손이 잠시 굳고, 귀 끝이 벌겋게 달아오른 걸.


독자에게


여러분이라면 어땠을까요?

정면으로 들이받고 폭로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손처럼, 실수인 척 던진 메일 하나로 은근히 굴욕을 주시겠습니까?


“악마들의 장기판은, 영상으로도 이어집니다.”


4화의 쿠키영상은 YouTube Shorts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영상 댓글에는 쿠키영상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꼭 확인해주세요.

https://youtube.com/shorts/fnC5ErCExeU

쿠키영상 – 기생충의 디테일

강영훈의 ‘기생충적 습성’은 일상 구석구석에도 묻어 있었다.


자리 한쪽엔 법카 영수증이 바인더에 차곡차곡 꽂혀 있었다.
꼼꼼히 날짜별로 정리된 그 종이 뭉치.
마치 자료 보존가라도 된 듯 보였지만, 이유는 단순했다.
혹시라도 한 장이라도 누락돼 회사가 돌려달라 하면, 절대 자기 돈을 뱉지 않겠다는 집착이었다.

협력업체에서 받은 선물은 쓸모 없는 것일수록 따로 모아뒀다.

그리고 포장지만 교체해 팀원들의 생일 선물로 건넸다.

“대리님, 생일 축하드려요.”

겉으론 세심한 배려 같았지만, 속은 ‘버릴 걸 재포장한 합리화’였다.

후배의 결재 서류엔 딱 한 줄 고쳐주고는, 이름을 자기 걸로 갈아치워 올려버렸다.
노력은 최소, 공은 최대. 완벽한 방정식이었다.

작지만 집요한 습관들.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누군가는 침묵 속에서 욕을 삼켰다.
그러나 그 모든 찌꺼기가 켜켜이 쌓여—

오늘의 ‘기생충 강영훈’을 완성했다.

그 광경을 떠올리며 이손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쯤 되면 생존이 아니라…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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