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 영원한 하나

꼭대기층의 악마들 - 5화

by 이서하

※ 본 작품 『꼭대기층의 악마들』은 실제 직장 생활에서 모티브를 얻은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 조직, 회사, 장소명 등은 모두 창작이며 실제와 무관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땅값 비싼 동네, 삼정역 앞 17층 빌딩.


그 꼭대기층에는 악마들이 산다.
그리고 오늘, 이손은 그 악마들의 장기판에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오늘의 악마 도감

본 에피소드의 중심이 되는 인물입니다.

한서진 부장 (44세)

악마별칭 : 너구리영감

언변과 계산의 달인.

회식 테이블 위에서는 삼겹살 가격표까지 권력 도구로 만든다.

술잔을 들 때마다 ‘격려’라 말하지만, 그 속엔 통제와 기록이 숨어 있다.

윤태호 주임 (32세)

악마별칭 : 젠틀커터

언제나 매너 있고 부드러운 미소.

정면 거절은 하지 않는다. 대신 합리적인 이유로 상대를 스스로 물러나게 만든다.

겉으론 예의 바른 동료지만, 그 미소는 언제나 누군가를 잘라내는 칼날이다.


송별 공지와 마지막 업무

아침 회의. 한서진 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저녁은 이 주임 환영회 겸, 윤 주임 송별회다. 다들 참석하도록.”


박수 몇 번, 억지웃음 몇 개.
‘합류 축하’와 ‘파견 송별’이 섞인 공기는 묘하게 어정쩡했다.


점심 무렵, 협력업체 직원이 다급히 윤태호를 찾아왔다.
“윤 주임님, 이번 납품 건 좀 봐주셔야겠습니다. 규격은 다 맞는데, 심사자가 너무 까다롭게 봐서요… 승인만 도와주시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류를 훑어본 이손. 수치상 문제는 없어 보였다.
다만 심사관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듯했다.
‘운이 없군.’ 그는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윤태호는 환하게 웃으며 의자를 돌렸다.
“아, 이 부분이군요. 많이 곤란하시겠습니다. 저도 정말 안타깝네요. … 흠, 만약 제가 이 부분을 조금이라도 손봐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직원의 얼굴에 순간 희망이 번졌다. 그러나 윤태호는 결재란 위에 펜을 올려놓았다가, 이내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다만 기준은 기준입니다. 제가 마음대로 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직원의 표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희망은 있었지만,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더 쓰라렸다.
주변은 그저 ‘매너 있는 대응’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손만은 꺼림칙했다.

“겉으론 매너인데… 저건 분명, 뭔가 감춰진 것 같군.”

삼겹살의 회계학

저녁, 고깃집 테이블 위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누군가 메뉴판을 집어 들고 말했다.

“소고기 한 판 어때요?”


한서진이 곧장 손을 뻗어 메뉴판을 눌러버렸다.

“이 집은 삼겹살이 제일 맛있어. 소고기는 불 조절 조금만 틀려도 질겨서 대화가 다 끊겨.”


말끝은 부드럽고 단정했지만, 칼날처럼 반박 불가였다.

순간 공기는 ‘맞는 말이네’로 흘렀고, 소고기 얘기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서진의 언변은 늘 그렇게 예산을 논리로 바꿔 덮었다.

1인당 4만 원 회식비.

한서진에게 메뉴는 ‘입맛’이 아니라 ‘관리비’였다.


잔이 돌 무렵, 오진혁이 불쑥 물었다.

“윤 주임님, 낮에 협력업체 건은 어떻게 됐어요?”


윤태호는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번졌다.

“아, 그건 제가 개입하면 오히려 더 복잡해집니다. 인수인계가 끝난 지금은, 이손 주임이 직접 정리하시는 게 훨씬 깔끔하죠.”


기막히게 합리적인 말, 부드러운 톤, 결코 흠잡을 수 없는 표정.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윤 주임답네.”


그러나 이손은 잔을 입술에 대고 잠시 멈췄다.

"말은 완벽했는데…교묘하게 짐을 떠넘기는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소주잔이 몇 번 돌자, 한서진이 잔을 들었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내일 반차 쓰든, 연차 쓰든 마음대로 해라! 오늘은 내일이 없다!”


격려 같았지만, 모두의 숟가락이 동시에 멈췄다.

‘오늘 밤은 끝까지 가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만리 노래방 – 파도의 시작

마지막 무대는 늘 똑같았다.


만리 중국집 지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노래방.

그저 ‘만리 노래방'이라 불렸다.


90년대에 멈춘 듯한 낡은 인테리어, 삼정역 시세 그대로인 가격.

그러나 이곳에서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첫 곡은 언제나 〈파도〉.

노래방 문이 닫히자마자 직원들이 줄지어 서서 파도타기를 시작했다.

의미 없는 춤사위 같았지만, 한서진은 반드시 이 장면을 원했다.

“시작은 파도로. 그래야 회식이 굴러간다.”


노래방 직전, 여직원 셋(서지현, 최수아, 장서윤)은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한서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회사 생활은 다 같이 해야지. 단합이 이렇게 부족해서야 되겠어?”


그러나 속으론 미세하게 웃었다.

늦은 새벽, 술, 여자.

이 세 가지가 합쳐지는 순간, 회사 인생은 쉽게 무너졌다.

그는 이미 최상위 포식자의 자리를 눈앞에 두고 무너진 임원들을 여럿 보아왔다.


능력 있고 야망 있던 자들이 추문 하나로 퇴장당하는 꼴을.

그는 달랐다.

'리스크는 술자리에서 터지지 않는다. 터지기 전에 잘라내는 게 악마의 원칙이었다.'


남은 건 남자들뿐.

술잔이 오가고, 목청은 점점 높아졌다.


“윤 주임, 마지막 회식인데 한 곡 하시죠!”


윤태호는 부드럽게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저는 노래를 잘 못해서 분위기를 깰 것 같아요. 차라리 김 대리님이 하시면 훨씬 신나지 않겠습니까?”


목소리는 따뜻했고, 표정은 매너 있었다.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았고, 분위기는 자연스레 다른 쪽으로 흘렀다.


윤태호는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러나 이손의 눈에는 그 미소가 ‘자기 손은 더럽히지 않고도 타인을 소모시키는 방식’처럼 보였다.

“표정은 따뜻했는데, 그 미소 안에선 기묘하게 사람을 소모시키는 방식이 번뜩였다.”

도주와 귀환

밤이 깊어가자, 이손·윤태호·오진혁은 눈빛을 교환했다.

이쯤이면 도망쳐야 했다.


한서진은 잔을 비우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만취했다고 착각한 순간이었다.


‘지금이 타이밍이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문을 빠져나온 셋은 곧장 택시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스친 불빛에 안도감이 번졌다.
‘끝났다. 드디어 집에 간다.’

그러나 30분쯤, 택시가 다리를 건널 즈음 휴대폰이 울렸다.
한서진이었다.
“어디야? 당장 돌아와.”


그때 윤태호가 차분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는 내일 파견 준비가 있어서요. 아직 정리 못 한 게 많습니다. 두 분이 다녀오시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매너 있었고, 이유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이손과 오진혁만 다시 노래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한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어, 이제 파하는 분위기인데? 사진이나 찍자.”


허탈함이 목구멍에 차올랐다..

‘이럴 거면 왜 돌아오라 한 거지…’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어깨동무를 했다.

잔뜩 부은 얼굴들 사이, 억지 구호가 터졌다.

“우리는 하나, 영원한 하나!”


그러나 셔터를 누른 건 이손이었다.
사진 속엔 모두가 있었지만, 정작 이손은 없었다.

“지금은 사진 밖의 배경일뿐…
하지만 언젠가는, 그 중심에 서겠지.”

셔터 소리와 함께, 이손의 속내는 어둡게 빛났다.


출석 체크

아침 7시, 한서진은 이미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전날 술자리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셔츠는 빳빳했고 눈빛은 선명했다.


정규 출근 시간 9시.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복도와 출입문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였다.


15분 지각한 사람,

오전 반차를 낸 사람,

연차를 낸 사람,


다음 날 아침, 그는 이미 모두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회식은 새벽 노래방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진짜 마지막은, 그가 기록을 끝낸 순간이었다.


독자에게


사진 속에서 외친 구호는 ‘우리는 하나’였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악마들의 장기판은, 영상으로도 이어집니다.”


5화의 쿠키영상은 YouTube Shorts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영상 댓글에는 쿠키영상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꼭 확인해주세요.

https://youtube.com/shorts/fFMylyrQBYE

쿠키영상 1 ― 젠틀커터

늦은 밤, 커피 자판기 앞.

윤태호가 종이컵을 꺼내 들었다.


그때 한 선배가 부탁을 흘리듯 던졌다.

“윤 주임, 내일까지 이거 좀 같이…”


윤태호는 환하게 웃었다.

“선배님이 워낙 꼼꼼하시잖아요. 제가 거들면 괜히 스타일 안 맞아서, 오히려 두 번 보시게 될 겁니다.

선배님이 직접 하시는 게 아무래도 제일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말끝까지 부드러운 미소였다.

선배는 오히려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윤태호는 종이컵을 커피받침 위에 내려놓으며 혼잣말했다.

“웃으면서 거절하는 게 제일 깔끔하죠. 상처도 덜하고, 제 손도 안 더러워지고.”


그의 미소는 변함없었지만, 차가운 본질이 그 틈새에서 흘러나왔다.


https://youtube.com/shorts/VG20XkWRIA4

쿠키영상 2 ― 남은 자

십 년 뒤, 낡은 사진 한 장이 한서진의 사무실 서랍 속에서 발견됐다.


젊은 얼굴들이 술에 절어 외친 구호,

“우리는 하나, 영원한 하나!”


그러나 그 사진 속 인물들 중, 제아상사에 남아 있는 이는

오직 한서진뿐이었다.


“결국 하나는 맞았다. 나 혼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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