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 1호봉, 소수점의 남자

꼭대기층의 악마들 - 1화

by 이서하

※ 본 작품 『꼭대기층의 악마들』은 실제 직장 생활에서 모티브를 얻은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 조직, 회사, 장소명 등은 모두 창작이며 실제와 무관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땅값 비싼 동네, 삼정역 앞 17층 빌딩.

대한민국 상사의 성공 신화, 제아상사.


그 꼭대기층에는 악마들이 산다.
그리고 오늘, 이손은 그 악마들의 장기판에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첫 출근길

이손의 아내가 현관에서 말했다.


“여보, 너무 힘들어 보이는 곳이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아내의 말은 응원인지, 걱정인지, 아니면 두려움의 예언인지 알 수 없었다.


인서울 끝자락. 학벌도 집도 끝자락.
지하철까지 20분을 걸어야 하지만, 뭐 어떤가. 그래도 인서울 아닌가.


하지만 4월의 따스한 봄볕 아래, 정장과 넥타이에 구두 신고 20분을 걷는 건 고역이었다.


그래서 택한 건 제아상사 앞까지 직통으로 가는 버스. 환승은 없지만, 종점에서 종점까지 무려 1시간 반.

'그래도 환승 없이 한 번에 가는 게 어디야. 아침 일찍 일어났으니 잠깐 눈 붙이면 되지.'


꾸벅꾸벅 졸다 내릴 정거장을 놓칠 뻔했다. 그렇게 이손의 첫 출근길이 시작됐다.


HR의 불편한 진실

팀 배정을 받기 전, HR에 먼저 들렀다.


“주임… 1호봉이라고요?”
이손이 놀라며 되물었다. 담당자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주임 1호봉? 그래도 대리 직전 말호봉은 되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4월. 제아상사의 정기 인사는 이미 3월에 끝났다.
즉, 불과 두 달 전까지 그는 사실상 ‘사원’이나 다름없는 직급이었다.

하아… 다시 대리까지 가려면 최소 2년은 걸리겠구나.


경력은 3년이 깎였다. 그래도 연봉은 1,500만 원이 올랐다.
이손은 스스로를 애써 위로했다.

뭐, 이 정도면…

낯선 첫 아침

제아상사는 삼정역 앞에 우뚝 선 17층 빌딩.

그리고 이손이 배정된 부서는 영업3본부1팀… 바로 그 꼭대기층.


회사에 가장 높은 층, 말 그대로 “꼭대기층의 악마들”이 사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 앞.
이손은 버튼을 눌렀다.
“17층.”

붉게 빛나는 숫자를 바라보며, 그의 입술이 저절로 말없이 움직였다.

‘낯선 곳이라 그런가. 왠지 악마 소굴로 올라가는 기분이군…’

문이 닫히자,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위로 올랐다.
층수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이손의 심장은 두 박자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드디어, ‘띵—’ 소리와 함께 17층에 도착했다.


사무실 문을 열자, 하루는 이미 시작돼 있었다.
모니터 불빛, 키보드 소리, 전화벨.


그 사이에서 이손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손 속으로 생각했다.

'신규 입사자는 컴퓨터보다 먼저 인내심부터 지급받는다.'


“왔습니까?”

짧고 차가운 목소리. 한서진 부장(너구리영감)이었다.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고 그의 존재를 받아쳤다.


“윤 주임, 자리 안내해요.”
윤태호 주임(젠틀커터)이 덩달아 손짓하며 안내했다.


텅 빈 책상과 첫 텃세

자리로 다가가자,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모니터도, 키보드도, 볼펜 하나도 없었다.


“어… 이상하네요. 준비됐다고 했는데.”

윤 주임(젠틀커터)이 어깨를 으쓱하며 당황했다.


그때, 옆자리 최수아 대리(칼잡이선배)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 신규 입사자가 너무 오랜만이라 절차가 기억이 안 났어요.”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덧붙였다.
“저희가 깜빡했나 봐요. 그런데 부장님은 계속 면접 탈락시키시다가 갑자기 뽑으신 것을 보니 기대가 크신가 봐요~”


장서윤 대리(쇼윈걸)도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맞아요. 첫날부터 긴장되겠네요. 아, 저희가 물품 준비는… 음, 조금 늦었습니다.”


이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이게 텃세구나.'


그때 오진혁 사원(오갈량)이 다가와 소곤댔다.
“주임님, 사무용품은 제가 발주해서 준비해 드릴게요. 제가 잘 서포트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그의 말에 긴장된 공기가 잠시 풀렸다.


정보화팀으로 향한 신규 입사자

“컴퓨터 지급받으러 왔습니다.”
정보화팀에 도착하자, 퉁명스러운 목소리.
“저기 있는 거 가져가세요.”
고개도 들지 않고 박스를 건네준다.


무겁디무거운 본체와 모니터를 끌어안고 계단을 오르며, 첫 텃세를 몸소 체험했다.


사람 좋은 팀장, 답답한 팀장

자리로 돌아오자, 유상우 팀장(우유맨)이 다가왔다.
“어, 이손 주임. 자리 마련은 됐나요?”
넉넉한 미소와 친근한 목소리.


“보시다시피 우리 팀이 좀 바쁩니다. 그래서 아마 신경을 많이 못 쓴 것 같아요. 하지만 천천히 적응하면 돼요.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사람은 좋아 보였지만, 동시에 결정을 미루고 우왕좌왕할 것만 같은 답답함묻어났다.


첫 미팅, 숨겨진 발톱

회의실에 팀이 모였다.

“결혼했어요?” 누군가 물었다.
“네, 신혼입니다.”


서지현 대리(미소칼날)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집들이해야겠네요~”

분위기는 한순간 풀렸지만, 그녀의 눈빛은 '네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차가운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자기소개 차례.
“강림상사에서 왔습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강영훈 과장(기생충)이 말을 이었다.
“집은 어디예요?”
“고일동입니다.” 이손이 조심스레 답했다.
“그래도 인서울이네? 학교는 명운대 나왔다면서요? 음… 뭐, 집값만 오르면 되는 거죠.”


웃는 얼굴이었지만, 계급과 부동산 집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이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집값은 무슨… 난 전세라 오르면 손해만 보는구먼, 이놈아.’


최수아 대리(칼잡이선배)와 장서윤 대리(쇼윈걸)는 눈빛을 교환하며 미소를 숨겼다.
윤 주임(젠틀커터)만이 응원한다는 듯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사건 – 문서 숫자 오류

진짜 문제는 이어진 보고서였다.
화면에 띄워진 엑셀 자료를 보던 서지현 대리(미소칼날)가 손을 들었다.
“합계가 안 맞습니다. 여기, 3월 분 수량. 이런 기본부터 다시 점검해야죠.”
겉으로는 상냥했지만, 말투는 단호했다.


모두의 시선이 강영훈 과장(기생충)에게 쏠렸다.
“아, 그거요? 지난주에 수정했는데… 뭐, 총액만 맞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는 태연하게 웃었다. 그러나 책상 밑에서는 법인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손은 문득 떠올렸다. 오전에, 오진혁 사원(오갈량)이 건네던 말.
“강 과장님은 개인 돈은 절대 안 쓰세요. 대신 회삿돈은 1원까지 털어먹는 분이죠.”
그 소문이 눈앞에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서지현 대리(미소칼날)는 웃음을 유지하며 다시 말했다.
“총액만 맞으면 된다는 건, 경영팀이나 감사팀이 좋아할 말은 아니죠.”


공기가 살짝 얼어붙었다.

유상우 팀장(우유맨) 이 손을 내저으며 정리했다.
“아, 뭐… 오늘은 그냥 넘어가죠. 다들 바쁘니까.”
좋게 좋게 넘어가려는 그의 태도. 그러나 누구도 납득하지 못한 눈빛이었다.


첫 업무 배정

회의가 끝나자, 최수아 대리(칼잡이선배)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오늘은 적응 차원에서 가볍게 하나 맡겨드릴게요. 어제 자료인데, 숫자 정리 좀 부탁드려요.”


장서윤 대리(쇼윈걸)가 덧붙였다.
“맞아요. 합계랑 비율만 다시 계산하면 돼요. 간단하죠?”


무시당하는 신규 입사자

이손이 꼼꼼히 들여다보자, 강영훈 과장(기생충)이 툭 던졌다.
“에이, 그런 건 그냥 대충 맞으면 되지. 총액만 맞으면 되잖아?”


최수아 대리(칼잡이선배)는 시큰둥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신규 입사자라 그런지 열심히네.”


장서윤 대리(쇼윈걸)는 시계를 보며,
“시간 오래 걸리면 곤란한데요? 우리 다 바빠서요.”


모두의 무심한 말속에서, 이손은 묵묵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손의 완벽주의

두 시간 뒤, 파일은 완전히 달라졌다.

숫자 하나하나 검증 → 오류 7개 수정

소수점 하나까지 강박적으로 맞춤 → ‘. 0’까지 통일

글꼴, 크기, 간격, 줄맞춤까지 전부 통일

셀 서식과 색상 코드까지 균일하게 맞춤


마치 원래부터 있던 보고서가 아니라 새로 디자인된 문서 같았다.

이손은 조용히 메일로 파일을 전달했다.
“정리했습니다.”


팀의 반응

최수아 대리(칼잡이선배)가 파일을 열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 이거, 생각보다 깔끔하네?”


장서윤 대리(쇼윈걸)도 모니터를 기울여 보며 중얼거렸다.
“숫자 맞춤이 다 되어 있네… 소수점까지.”


강영훈 과장(기생충)은 팔짱을 풀고 키득거렸다.
“와, 신규 입사자가 첫 업무부터 소수점까지 다 맞춰왔네. 대단한 집요함이네.”
말은 비아냥이었지만, 눈빛은 살짝 긴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서지현 대리(미소칼날)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좋아요. 이런 게 기본이죠. 디테일을 잡아야 큰 실수가 없습니다.”
말은 칭찬이었지만, 어쩐지 ‘넌 내 기준을 충족할 수 있을까?’라는 시험처럼 들렸다.


조용한 응원

그때, 옆에서 오진혁 사원(오갈량)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임님, 진짜 꼼꼼하시네요. 든든합니다. 제가 옆에서 열심히 돕겠습니다.”


그의 눈빛엔 진심 어린 존경이 담겨 있었다. 이손의 긴장된 마음 한켠에 처음으로 작은 온기가 스며들었다.


첫날의 그림자

사무실 공기는 다시 평소처럼 바빴지만, 어쩐지 달라져 있었다.
모두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 그냥 만만한 신규 입사자는 아니구나.’

오늘은 단순히 살아남은 게 아니라… 뭔가를 보여줬다.

독자에게


여러분의 첫 출근은 어땠나요?
책상보다 먼저, 숫자와 서식이 여러분을 반겼나요?”


“악마들의 장기판은, 영상으로도 이어집니다.”


1화의 쿠키영상은 YouTube Shorts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영상 댓글에는 쿠키영상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꼭 확인해주세요.


https://youtube.com/shorts/KRTwBqp-_qk


쿠키영상 – 오진혁의 메모

퇴근길 편의점 앞, 오진혁은 음료수를 들고 벽에 기대선 채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작은 화면 속에는 빼곡한 글씨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부장님은 글자체 Franklin Gothic Medium…

”과장님은 보고서 요약 두 줄이면 만족…”

“대리님은 실무는 정확하지만 포장에 약점…”

“새로 오신 주임님은 숫자·서식 강박. 활용 가능.”


그는 피식 웃으며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마치 누군가의 뒷모습을 관찰한 과학자처럼, 모든 특징을 데이터로 저장해두는 습관.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람은 성격이 아니라 사용설명서로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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